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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14좌 베이스캠프를 가다 (16) 낭가파르바트<하>

정상고집 2014. 3. 25. 12:06

히말라야 14좌 베이스캠프를 가다 (16) 낭가파르바트<하>

[중앙일보·밀레 공동기획] 해발 3000m에 천연 크리켓 구장 … 신성한 설산 밑은 아이들 놀이터

어리 메도우에서 바라본 해질녘 낭가파르바트. 지난해 여름 이창수 작가가 촬영한 사진이다.

지난 6월 24일(이하 현지시간), 우리 일행은 예정대로 낭가파르바트(Nanga Parbat·8125m) 루팔(Lupal) 베이스캠프(3500m)를 향해 계속 걸었다. 전날 벌어진 텔레반에 의한 외국인 등산객 학살 소식을 듣고 등반을 계속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지만 우리의 발걸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오른 베이스캠프에서 바라본 낭가파르바트는 그지없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거벽은 마치 인간들이 저지른 비극에 대해 침묵으로 일갈하는 것 같았다.

 

 

탈레반과 마주칠까봐 조마조마

 1 베이스캠프 주변으로 나무를 하러 가는 주민. 아이는 파키스탄 전통 복장을 입었다.

 


트레킹 시작점인 타르싱(Tarshing·2950m)과 루팔 마을(3100m)을 지나니, 석회석을 쌓아놓은 듯한 회색 언덕이 나타났다. 파키스탄 산악 지대에서 흔한 빙퇴석 지대로 사막처럼 황량하다.

오르막이 막 시작되는 왼편으로 빙하가 흐르면서 만들어낸 삼각주 초지대에서 마을 청년과 아이들이 편을 갈라 크리켓 게임을 하고 있었다. 언덕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봤다. 신성한 설산 아래 자리 잡은 크리켓 구장은 천연 그라운드였다. 이런 높은 지역에 크리켓 구장이 다 있다니 신기하기만 했다.

크리켓을 즐기는 모습은 그지없이 평화로웠지만, 산 너머 불과 20㎞ 떨어진 곳에서 간밤에 10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다시금 불안감이 엄습했다. 가이드 이스마일은 베이스캠프로 올라가는 중에도 주의를 줬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도주하는 탈레반이) 디아마르(Diamar)에서 마제노패스(Mazeno pass·5399m)를 넘어오면 여기 루팔 쪽이에요.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2 루팔마을에서 페어리 메도우 가는 험준한 길. 파키스탄 산악 도로는 산만큼 위험하다.

 

 

루팔 마을에서 베이스캠프(BC)까지는 2시간이면 올라갈 수 있었다. 평평한 곳은 초지대를 이루고 있었지만, 빙하가 쓸고 내려간 지역은 마치 스키장의 하프파이프 경기장처럼 깊게 파여 있었다.

우리 일행이 찾은 베이스캠프는 정확히 말하면 헤를리히 코퍼(Herllig koffer·3500m) BC로 불리는 ‘로어 루팔(Lower Rupal)’이다. 여기가 트레킹 종착지다. 반면 보통 낭가파르파트를 오르는 원정대는 서쪽으로 더 올라간 랍부 메도우(Ratbu Meadow·3530m)에 베이스캠프를 차린다. 로어 루팔에서 빙하를 건너 거대한 둔덕을 넘게 되면 랍부 메도우다. 랍부 메도우를 지나 계속해서 시계 방향으로 돌면 마제노패스를 거쳐 디아마르 BC에 이른다. 낭가파르바트를 한 바퀴 도는 라운딩 길이다.

아쉽게도 낭가파르파트 정상부는 짙은 가스층에 가려 있었다. 꼭대기까지 모두 보여주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위압적이고 무시무시한 벽이었다. 2005년 김창호(44) 대장과 고(故) 이현조(2007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도전 중 사망)씨가 이 벽을 통해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올랐다. ‘세기의 산악인’으로 꼽히는 라인홀트 메스너(69·이탈리아) 이후 35년 만의 쾌거였다.

 


평온한 베이스캠프, 그러나 두려웠다

 

 3 땔나무를 지고 내려가는 당나귀. 장작은 현지 주민에게 생필품이다.



BC 주변은 히말라야 마못(Himalaya Marmot)이 유난히 많았다. 히말라야 고산의 터줏대감으로 4000~5000m에서 자주 목격되는 설치류다. 이곳의 마못은 유난히 살이 통통하다. 이놈들을 부르는 별명 중 하나가 ‘티베트 눈 돼지’라는데, 커다란 엉덩이를 흔들어대며 뒤뚱뒤뚱 걷는 모양이 새끼 곰에 가깝다. 귀여운 모습에 가까이 다가가자 ‘낑낑’ 소리를 내며 위협을 했다. 예전에는 밍크만큼 옷을 만드는 재료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우리는 목초지에서 점심을 즐겼다. 자파티(밀가루 반죽을 화덕에 구운 파키스탄의 전통 빵)와 한국 라면, 차이(인도식 홍차)가 차례로 나왔다. 이틀 일정을 하루로 당길 예정으로 허겁지겁 올라온 터에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은 꿀맛이었다. 라면은 고소에서 소화가 안 되는 음식이지만, 어차피 곧장 내려갈 계획이었으므로 그런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라면으로 허기를 때운 우리는 루팔 벽 바로 아래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눈대중으로 30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을 따라온 파키스탄 트레커들이 동행했다. 벽 바로 아래서 내려다본 목초지는 그지없이 아름다웠다. 목초지 아래 빙하가 흐르는 강 너머로 히말라야 5000m급 설산이 병풍처럼 펼쳐졌다.

당나귀를 끌고 온 현지인들은 베이스캠프 주변에서 땔나무를 구했다. 히말라야 향나무와 소나무가 베어져 나갔다. 조경이나 분재 애호가가 봤다면 깜짝 놀랄 일이다. 그러나 누구도 이들을 탓할 수가 없다. 3000m 이상은 한여름에도 불을 때야 한다. 오히려 석유 연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이들이 더 친환경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이스 캠프로 되돌아온 일행은 하산길을 서둘렀다. 애초 일정은 베이스캠프에서 하룻밤을 묵는 것이었다. 그러나 간밤의 외국인 학살 소식을 듣고 야영을 강행할 수는 없었다.

 

 

 하산길엔 군·경 30여 명이 에스코트

 

  4 베이스캠프에서 여유로운 점심.


하산길엔 발바닥에서 불이 났다. 한 번도 쉬지 않고 곧장 걸었기 때문이다. 오후 8시 사위는 어둑해졌다. 어둠 속에서 돌과 자갈이 발부리에 채였다. 하지만 일행 누구도 헤드랜턴을 꺼내지 않고 어둠 속을 걸었다. 마음이 급하기도 했지만 혹시나 텔레반에 불빛이 노출될까 봐 걱정이 들어서였다.

초조함이 엄습할 무렵 일단의 사내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주도(州都)인 길기트(Gilgit) 경찰 복장을 한 사내들이었는데 타르싱 마을 경찰 분소에서 우리를 마중 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어깨에 AK자동소총을 메고, 한 손에는 가시가 촘촘히 박힌 나무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텔레반과 대적할 경찰치고는 좀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그게(나무 막대기) 우리를 보호할 무기인가요?”

“맞아. AK 소총은 첫 번째 무기, 이것은 스페어(여분의) 무기지. 걱정 말고 따라와, 하하.”

경찰 대여섯 명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배 나온 남자가 말했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유머가 있어 좋았다. 조금 더 내려가자 이번에는 길기트 산악부대소속 1개 분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타르싱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떨어진 아스토르(Astore) 주둔지에서 급파한 군인이었다. 뜻하지 않게 경찰과 군인 30여 명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하산했다. 느닷없는 호위에 안심하면서도 ‘보통 일이 아닌가 보구나’라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탈레반 근거지 지나야 하는 귀국길




타르싱에서 묵은 우리 일행은 다음날 아침 서둘러 공항이 있는 스카르두(Skardu)로 이동했다. 파키스탄 탈레반의 근거지인 칠라스(Chilas) 일대를 지나야 하기 때문에 아침 일찍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스카르두는 K2(8611m) 등 카라코람 산맥에서 발원한 쉬가르(Shigar) 강과 티베트 고원에서 발원한 쉬요크(Shyok)강이 합류해 인더스강을 이룬다. 물길을 크게 휘돌아가는 곳에 스카르두가 있다.

스카르두 숙소에 앉아 인더스강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아쉬움이 밀려왔다. 페어리 메도우(Fairy Meadow·3306m)와 참사가 벌어진 디아미르 BC를 끝내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정의 목초지’라는 뜻의 ‘페어리 메도우’는 1930년대 독일원정대가 붙인 이름인데 K2 베이스캠프와 더불어 파키스탄을 찾는 트레커가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곳이다. 낭가파르바트를 상징하는 사진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넓은 초지에 텐트가 있고 그 뒤로 설산이 병풍처럼 펼쳐진 사진이다. 바로 그 초지가 페어리 메도우로, 수십 년 동안 파키스탄 트레킹을 상징하는 사진으로 쓰이고 있다.

페어리 메도우는 스카르두에서 자동차로 하루 만에 갈 수 있는 곳이다. 게스트하우스가 있으며 야영도 가능하다. 파키스탄과 중국을 잇는 카라코람하이웨이에서 라이콧(Raikot) 다리를 건너 젤(2666m)까지 지프를 타고 간 다음, 서너 시간만 걸으면 닿는다. 전나무와 삼나무가 우거진 숲길이 5㎞ 정도 이어지는데 그 길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고 한다.

낭가파르바트(파키스탄)=김영주 기자
사진=이창수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