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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첸중가 초등당시...

정상고집 2014. 7. 4. 11:10

그들은 '신의 거처'를 밟지 않았다

세계 3위봉 … 19세기 중반 존재 알려져

각국 합심해 원정대 꾸렸지만 등정 실패

1955년 영국원정대, 50년 만에 처음 올라


“정상으로 오르는 등반은 죽음과의 사투(死鬪)였고 등정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올랐다.” -주스토 제르바수티.

캉첸중가(Kangchenjunga).
높이 8586m의 세계 3위봉 캉첸중가는 동부 히말라야 캉첸중가 산군의 제왕이다. 네팔과 시킴. 티베트를 연결하는 삼각지대에 위치한 캉첸중가는 다섯 개의 봉우리로 구성돼 있다. 해발 8586m의 주봉을 비롯해 서봉인 얄룽캉(8505m). 중앙봉(8475m). 남봉(8491m). 동봉인 캉바첸(7905m) 5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캉첸중가는 티베트어로 ‘거대한 눈(雪)의 다섯 개의 보고(寶庫)’라는 뜻으로 주봉을 비롯한 위성봉 5개 가운데 4개봉이 8000m를 훨씬 넘고 한 개 봉우리는 8000m에 조금 부족할 정도로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실제로 주봉을 비롯한 4개의 봉우리가 세계 5위봉인 마칼루(8463m)보다 높은 것을 감안하면 그 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캉첸중가는 인도의 휴양지로 유명한 다르질링에서 직선거리로 50㎞에 불과해 세상에 가장 먼저 알려졌다.
인도 사람들은 에베레스트가 발견되기 전까지 캉첸중가를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알았다. 캉첸중가는 8000m 14좌 등정을 노리던 엄홍길씨가 1999년 이곳을 찾았으며. 등반 도중 눈사태로 한도규 대원과 KBS 현명근 기자가 숨지는 사고로 우리에게는 익숙한 산이다.

◆캉첸중가 베일을 벗다
먼발치에서 캉첸중가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그 높이와 산세에 위압감을 느꼈다. 감히 도전하지 못하고 바라만 봤다.
캉첸중가 최초의 지도는 19세기 중반 학자이자 탐험가인 린진 남기알이 측량해 제작했다. 이 지도는 서양인들에게 캉첸중가의 존재 사실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1848년과 1849년 2년간 걸쳐 식물학자 조지프 후커 경이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캉첸중가 지역을 조사. 지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캉첸중가를 처음으로 탐사한 인물은 영국 알파인클럽 회장인 윌리엄 더글라스 프레쉬필드였다. 1899년 프레쉬필드는 유명한 사진작가인 비토리오 셀라와 함께 캉첸중가를 둘러봤다.

이탈리아 출신인 비토리오 셀라는 훗날 ‘세계 산악사진의 아버지’로 불리며 히말라야를 대표하는 사진을 숱하게 남겼다.
특히 그는 1897년 이탈리아의 탐험가이며 등반가인 아부루치공과 함께 알래스카 세인트 앨리어스(5488m)를 등정한 것을 비롯해 유럽 최고봉 앨브루즈(5633m)를 1889~1890년. 1896년 세차례 탐험했다.
또 1909년 아부루치공이 이끈 이탈리아 K2원정대에 참가해 카라코롬산맥을 탐험하고 K2를 세계 최초로 정찰하는 등 K2 모습을 일반인들에게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프레쉬필드와 셀라는 캉첸중가의 지형과 등반루트 등을 관찰한 후 ‘캉첸중가 일주(Round Kangchenjunga)’라는 답사 여행기를 펴내 캉첸중가의 존재를 알렸다. 이들이 출간한 보고서는 캉첸중가가 등정될 때까지 교과서로 읽혀질 정도로 중요한 지침서가 됐다.

◆50년간 계속된 정상도전
캉첸중가 등반은 다른 산과 특별한 점이 있다. 안나푸르나. 에베레스트. K2. 초오유. 마칼루는 세계 각국이 개별적으로 등반을 하는 추세였다면 캉첸중가는 산악인들이 의기투합한 합동대였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어마어마한 산세에 한 국가의 등반력으로 오를 수 없다는 결론에서 출발했는지도 모른다.
이를 증명하듯 초기 캉첸중가는 합동대로 원정대를 구성했다. 1905년 영국. 스위스. 이탈리아 합동등반대가 캉첸중가에 도전장을 던졌다. 영국 산악인 크롤리가 이끄는 합동대는 등반시기를 8월 몬순기로 잘못 선택하는 바람에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또 합동대인 만큼 등반루트나 각종 결정권을 놓고 영국과 스위스가 반목하면서 큰 성과를 내지 못했으며. 장비도 턱없이 부족해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6300m 지점에 7캠프를 건설한 후 하산하다 포터 1명이 추락하면서 눈사태가 발생. 4명이 사망하는 비극을 맞았다. 결국 1차 원정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이후 24년간 등반은 없었다. 무려 25년 만인 1929년 독일이 캉첸중가를 찾았다. 당시 독일을 대표하는 파울 바우어가 이끄는 원정대는 북동릉으로 7400m까지 진출했지만 기상악화로 등반을 포기했다.
1930년 귄터 뒤렌푸르트 지휘로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4개국 합동대가 세 번째로 정상 도전에 나섰지만 유능한 셰르파 체탄이 눈사태로 숨지는 희생만을 남겨둔 채 7400m 지점에서 철수했다.
파울 바우어는 2년 후인 1931년 1차 원정에 참여했던 8명의 대원에 등반력을 갖춘 대원들을 보강. 도전했다. 독일원정대는 7700m에 진출한 후 8캠프로 식량과 장비를 운반하던 헤르만 샬러와 셰르파 1명이 연결한 로프가 끊어지면서 사망하고. 셰르파 우두머리인 사다가 병으로 사망하자 캉첸중가의 정상을 넘지 못한 채 7700m 진출기록을 남기고 쓸쓸히 패퇴했다.

◆정상 1m 앞에서 발걸음 멈춰
캉첸중가 정상을 도전한 지 꼭 50년이 지난 1955년. 영국이 캉첸중가에 대한 다섯 번째 원정대를 파견했다.
영국원정대를 이끈 원정대장은 찰스 에반스였다. 찰스 에반스는 1953년 영국이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초등할 때 원정대원으로 참여해 등정에 밑거름이 된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에베레스트 원정을 바탕으로 장비 개선은 물론 고소용 식량을 개발하는데 주력했으며. 그의 이같은 노력은 캉첸중가 등반에 큰 도움이 됐다.

1955년 4월26일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등반에 나섰다. 영국은 기존 등반 시기가 너무 늦은 것을 감안. 일찍이 베이스캠프를 설치했으며 등반기간 좋은 날씨에 힘입어 등반 보름만인 5월13일 해발 7700m에 5캠프를 설치했다.
비록 셰르파 1명이 크레바스에 추락 사망했지만. 그들은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5월24일 대원들은 새롭게 개선해 가볍고 성능좋은 산소기구를 착용. 해발 8200m에 6캠프를 건설하는데 성공했다.
지난 50년간 인간의 도전을 강력하게 거부하던 캉첸중가 정상 등정이 가시권에 들어온 것이다. 역사적인 5월25일 조지 밴드와 브라운은 6캠프를 출발해 웨스트 콜과 연결된 쿨르아르를 올라 정상으로 한발 한발 나아갔다.
그들은 불과 정상 1m를 남겨두고 발걸음을 멈췄다. 왜 조지 밴드와 브라운은 정상에 오르지 않았을까? 그것은 현지 주민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당시 주민들은 “신이 거처하는 정상에는 올라서지 말아 달라”고 원정대에 간곡히 부탁했다.
조지 밴드와 브라운은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멈춰선 것이다. 그들은 단 한번밖에 없는. 정상을 밟을 기회를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포기했다.(*산악회에서는 정상 1m를 남겨두고 멈춘 이들을 사실상 정상에 오른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어 2차 정상공격조인 하디와 스트리더 역시 정상에 올랐으며 이들은 1시간동안 산소마스크를 벗고 휴식. 가장 오랫동안 머물었다. 영원히 정상을 내주지 않을 것 같았던 캉첸중가는 이렇게 영국산악인들에게 정상을 허락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