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편은 히말라야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산 등정기에 관한 연작 시리즈 그 1부다.
영상에 나오는 원정대장인 존 헌트 대령은 1910년 인도에서 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군인이자 산악가다.
원래 초몰룽마(이하 초몰룽마로 표기)의 등반을 책임질 대장으로는 당시 최고의 등반가로 명성을 날리던 에릭 쉽튼이었습니다. 등반위원회의 위촉을 받아 대장직에 오른 그는 자신이 바라는대로 대원을 선발했고 이 때 에드먼드 힐러리 역시 그의 초빙을 받아 원정대에 합류하게 된다.
하지만 등반 위원회는 쉽튼의 리더십에 의구심을 가졌고 결국 등반이 시작되기 전 대장을 쉽튼에서 당시 대령인 헌트로 전격교체 했습니다. 이에 대해 등반팀은 굉장히 분노했으며 특히 힐러리의 분노가 굉장히 컸다고 한다.
이를 설득하기 위해 헌트는 힐러리에게 편지를 보내는 등 다양한 노력을 펼쳤다.
우여곡절 끝에 출발한 등반대는 1953년 4월 21일 마침내 최종 베이스캠프에 도착하여 정상공격을 준비한다.
영상에도 나왔듯이 당시 헌트는 정상 등반은 반드시 영국인이 해야 한다는 높으신 분들의 지시사항에 따라 영국인 등반가 두 명을 선발하는데요 이 때 선발된 등반가들의 이름은 찰리 애반슨과 톰 보우딜로이다.
헌트가 이런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 등산에 대한 각 국가별 자존심 경쟁이 작용했다.
당시 서구는 1차대전 이후 촉발되었던 등산열풍이 2차 대전을 계기로 잠시 사그라 들었다가 다시금 가열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프랑스,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등은 너도나도 자국 등반대를 더 높은 산에 등정시켜 국가전 위상을 높이고자 애썼다.
이 때 가장 선두주자인 곳은 프랑스로 1950년 M. 에르조그가 이끄는 등반대가 안나 푸르나 봉(해발 8,091m)을 등정하며 세계 최초 8,000m이상 산봉우리를 정복했다.
독일 역시 오스트리아와 연합한 등반대를 꾸려 영국보다 3개월 늦은 1953년 7월 3일 K.M. 헤르릴코퍼가 이끄는 등반대가 낭가파르밧(해발 8,126m)에 도전하여 헤르만 불이 초인적인 단독등반끝에 정복에 성공한다.
이렇듯 프랑스에 추월당하고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추격당하고 있던 영국으로서는 한시바삐 자국 등반가의 등정이 필요했던 셈이다.
하지만 선발대로 출발한 두 명은 결국 정상등반에 실패하게 되고 헌트는 결국 힐러리와 텐징에게 정상공격을 명하게 된다.
이 때 선발조의 실패에 헌트는 자신이 직접 정상을 등정하고픈 유혹에 시달렸지만 과감하게 이를 힐러리와 텐징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위기에 빠진 기존 선발대를 지원하기 위해 40대의 몸을 이끌고 해발 8,340m지점까지 진출한다. 이후 힐러리와 텐징이 정상을 등정하며 마침내 에베레스트 등정이 완려된다.
이후 헌트는 영국으로 귀국하여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게 되는데 이는 산악인으로써는 최초의 기사작위가 되었다.
이후 그는 이 때의 공적을 인정받아 1988년 에베레스트 초등 35주념 기념 원정대가 미국에서 결성 되었을 때 명예 대장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최초로 등정한 힐러리 못지 않게 헌트 역시 중대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 한다.(물론 자기 국가 사람이니 좀 더 가산점을 부여했겠지만...)
그는 1998년 11월 14일 영국 헨리 온 테임스에 있는 저택에서 88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분류는 people(사람), 출처는 다음 카페 '풋살 레볼루션'.
<옮겨온 글입니다>...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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