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한국, 일본이 가까운 곳에 위치한 탓에 블라디보스톡은 일찍이부터 무역, 외교, 상업의 중심지로서의 자리매김을 하였다.1890년대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도시는 급진적인 성장을 하였고 전세계의 무역전문가, 자본가와 외교관들은 이 곳으로 몰려들었다. 또한 광활한 러시아 대륙을 잇는 최장의 철도인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발착역이 건설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소연방 시대에 이곳, 블라디보스톡에 극동함대 본부가 자리잡게 되면서 외국인들뿐만이 아니라 자국민들조차도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군사상 보안지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소연방이 해체되고 난 후인 1992년 1월에야 이 곳은 다시 개방되었다. 권력의 부재와 정부-지역간의 정치적 갈등 등이 이전의 영화를 되찾는데에 장애로 작용하고 있기는 하나 "동방의 진주"라는 옛칭호에 걸맞는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오늘도 블라디보스톡은 움직이고 있다.
현재는 물류와 어업의 기능까지 더해져 인구 60만이 사는 연해주의 대표도시이다. 더 넓은 초원지대 끝 아무르만과 금각만을 끼고 있기에 앞으로의 개발도 기대되는 곳이다. 그런 이유인지 도시에는 젊은이들이 유난히 많으며, 공사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어 싱싱해 보이는 도시이다.
이곳 러시아 연해주(러시아의 행정 구역으로는 프리모르스키 지구라 한다)의 조선인 이민정책에 대하여 알아보자. 1870년대 기근을 피하기 위하여 두만강을 넘어와 크라스키노(연추) 하리 지신허(현재 비노그라드나야)에 13가구가 첫 고려인 마을을 형성한 후 얀치헤, 티진헤강 골짜기에 한인 마을을 형성하였다. 제정러시아가 연해주 지역 개발을 위하여 조선인들에게 무상의 토지 제공과 편의 시설을 마련해 주자 함경도 지역민을 중심으로 조선인들의 이주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1874년 연추 하리에서 블라디보스톡 개척리로 옮겨와 부두 어시장 노동자로 고려인마을이 형성되었다.(현재는 포크라니치야 거리 1번지로 체육시설이 들어서 있다) 그러다 1911년 콜레라 예방을 이유로 한인마을이 폐쇄되고 신한촌(노바야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으로 이주하여 1937년까지 연해주지역 한인 독립운동의 기지가 되었다.
조선인의 이주 증가로 소련정부와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침투가 가속화되는 속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구별이 어려워 일본인 스파이로 활동할 수 있다는 표면적인 이유와 연해주 지역 고려공산당의 강세로 자치구 설립에 불안을 느낀 스탈린은 연해주지역 조선인의 최대 참극인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가 자행되었다.
최근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1937년 스탈린 치하에서 감행된 재소고려인들의 비인간적인 강제이주는 소련 운동변강내무인민위원관리국 국장 게예츠 류스코프의 총책임하에 진행됐다고 한다. 이 자료는 “류스코프는 1937년 8월 크레물린의 스탈린에게 호출돼 비밀 훈령을 받고 18만 고려인들을 이주시켰다. 9월 초순에 고려인 콜호즈(집단농장)에서는 모든 사람들을 카자흐공화국으로 이주시킨다는 정부 결정에 따라, 1-3일간 최소한의 식량과 일용품을 가지고 길 떠날 준비를 할 것을 구두 통보했다. 1937년 11월 13일 현재 8개 열차가 왔는데, 처음 4개의 열차에는 1,059가정의 5,565명이 타고 있었다”고 보고 하고 있다. 재소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는 1937년 11월부터 12월 사이에 진행됐는데, 약 18만 명이 강제 이주당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런데 1939년도 소련 인구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재소고려인의 수가 17만 2천명이었으니, 결국 시베리아에 거주하던 고려인 전부가 이주당한 것에 다름없다. 더욱 비극적인 사실은 1926년에만 해도 25만 명을 넘었다는 재소 고려인이 강제 이주 후 17만 2천명 밖에 살아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많은 동포들이 강제이주 과정과 이주 후에 열악한 생존여건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짧은 기간에 그 많은 사람들을, 그것도 미개척지였던 중앙아시아에 강제 이주시켰으니 이 정책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조건에서 집행됐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총책임자였던 류스코프 조차 죄책감으로 일본에 망명, 그 사실을 고백했을 정도였다.
구소련 붕괴 후 일부는 중앙아시아에서 돌아와 현재 연해주지역 고려인(카레이스키)으로 살아가는데 그들의 민족에 대한 정체성은 어떠하며, 우리 국민과 정부의 관심은 어떠한지 새삼 되돌아본다. 연해주는 약 120여 민족들이 혼재해 살기에 민족에 대한 차별대우는 없는 편이며, 민족들의 혼재 탓에 미남미녀가 많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톡 주립 의과대학내 안중근의사 기념비기 있다. 올해가 안중근 의거 103주년이(1909.10.26) 되는 해이다. 도마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들을 모아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다가 여의치 않자 국내로 들어와 1907년 평양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의 참상을 보고, 10월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여 연해주 지역을 근거지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런 연고로 멀리 우수리만이 보이는 곳에 흉상을 세웠다. 그의 시선 너머 우수리만을 통해 그토록 바라던 비록 분단되었지만 독립된 조국이 있다. 그분의 육신은 아직 구천을 헤매나 영혼이라도 편히 쉬시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연해주 세 번째 정착촌인 신한촌 옛터이다. 해안지대에는 주로 일본인들이, 산기슭에는 조선인들의 집단촌이 형성되었다. 신한촌에는 연해주 한인들의 자치기관인 권업회가 결성되고 많은 애국지사들이 몰려들면서 재노령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지금은 고려인들이 거의 살지 않지만 1999년 08월 15일 신한촌 옛터 이곳에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에서 마음을 붙잡은 것은 민족의 최고 가치는 자주와 독립이다 라는 글귀이다. 이역만리 나라 잃은 설움과 이민족으로서의 차별 대우 속에서 조국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피눈물로 고생했을 그분들 생각에 마음이 많이 아팠다. 독립된 국가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음이 숙연해지고, 또 가슴이 먹먹해진다.
블라디보스톡에는 10여개의 대학이 있는데 송교수가 재직 중인 극동대학교 한국어과를 방문했다. 올해 한국어과 개설 110주년이라고 하는데 고합그룹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한국어과에는 고려인3,4세들이 재학하고 있는데 러시아 학생들보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송교수는 크게 아쉬워했다. 러시아 대학학제는 보통 5년제이며, 준박사(석사)는 3년 , 박사는 2년제이다. 대학원생들은 강의조교 형식으로 연구와 교육 두 가지 업무를 맡아보기에 대학원 학비는 저렴한 편이나 학위취득은 상당히 어렵다고 한다.
극동대학교를 뒤로하고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동쪽 출발점인 블라디보스톡 역으로 갔다. 모스크바까지는 9288㎞로 7박8일이 소요된다.(이 기차를 타고 언젠가는 바이칼호를 지나 러시아의 상뜨뻬쩨르부르크까지 꼭 가보리라) 1909년 10월 31세의 도마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하기 위하여 우덕순 등과 함께 북풍 칼바람 부는 이 블라디보스톡역을 출발했을 것이다. 그의 입장이 되어보려 애쓴다. 가슴에 스산한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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