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로운글

외상 3천원의 수치심…내 인생이 바뀌었다

정상고집 2020. 2. 10. 10:49

[창간 20주년 공모- 나의 스무살] 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노력으로 가득 차다

[오마이뉴스 이경수 기자]

<오마이뉴스>가 올해 창간 20주년을 맞아 '나의 스무살' 기사 공모를 진행합니다. 청춘이라지만 마냥 빛날 수는 없었던, 희망과 좌절이 뒤섞인 여러분의 스무살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편집자말>

 

 

1979년 봄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나는 14살 어린 나이에 철공소에 취직이 되어 점심 도시락을 싸가는 조건으로 하루 일당 천 원을 받는 소년 노동자가 되었다.

ⓒ pixabay



1979년 봄,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당시엔 국민학교라 불렀다)를 졸업한 나는 대구의 철공소에서 점심 도시락을 싸가는 조건으로 하루 일당 천 원을 받는 소년 노동자가 되었다. 그러나 어린 촌놈이 기름밥을 오래 먹은 공장 형들의 구박을 받아가며 기술을 배운다는 건 말처럼 쉽지 않았다. 기술을 배운다고 하더라도 열악한 근무 환경과 만족스럽지 못한 급여를 받아가며 평생 몸으로 부닥쳐 일해야 한다는 게 큰 부담으로 다가온 나는 한 곳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몇 개의 직업을 전전하며 옮겨 다녔다.

열아홉인 1984년 봄, 우리 삼 형제는 부모님이 평생 일군 농사를 물려받아 가난을 벗어날 돌파구 마련을 시도했다. 그러나 가을이 오기 전 보기 좋게 실패했다.

삼 형제의 서울 생활, 일보다 힘들었던 건...

그해 말 나와 두 형은 월세 보증금과 임시 생활비 37만 원을 갖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날 밤 구로구 가리봉시장 근처에 월세를 얻었다. 여러 세대가 작은 방에서 살아가는 일명 닭장집 또는 벌집이라 불리는 데였다.

시멘트 블록으로 쌓은 벽에 부엌이 딸린 자그마한 방이었지만, 자고 일어나면 벽에서 흙이 조금씩 떨어져 있곤 했던 시골집보단 훨씬 나아 보였다. 단지 어른 넷이 등을 붙이고 누우면 딱 알맞을 넓이였다. 미닫이 방문 건너편 벽엔 활짝 펼친 노트 크기의 창이 하나 있어 그나마 없는 것보단 나았다.

나와 큰형은 구로 2공단에 있는 성화상사에 입사했다. 가죽으로 된 안전화를 생산해 수출하는 회사였다. 구두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정작 삼천 원짜리 낡은 나일론 운동화를 신고 종일 서서 일하는 내겐 그렇게 보였다.

생산직으로 일하는 건 어딜 가나 거의 비슷했다. 여기서도 종일 신발 재료가 담긴 박스를 운반하고 그 안에 담긴 여러 종류의 부속 재료를 안전화 크기별로 분리하느라 몸이 늘 고달팠다.

 

 

 

1984년 겨울, 나와 두 형은 월세 보증금과 임시 생활비 37만 원을 갖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날 우리는 가리봉시장 근처에 여러 세대가 작은 방에서 살아가는, 일명 닭장 집에 월세를 얻었다.

ⓒ Pixabay



우리가 살던 집은 일을 끝내고 돌아와도 몸이 편하질 않았다. 돈을 아끼기 위해 추운 한겨울에도 연탄을 때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들처럼 따뜻하게 난방하지 않다 보니 방안과 바깥의 기온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추웠다.

어느 때부턴가 방안에서도 바깥처럼 겉옷을 잔뜩 껴입고 지냈다. 워낙 춥다 보니 삼 형제가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가며 꼭 붙어서 잠을 자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방 안에서 말을 할 때도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가끔 배가 출출해 석유풍로에 끓인 라면을 먹을 땐 더욱더 심했다. 우리의 입김과 라면에서 증발한 수증기는 그대로 천장에 닿아 하얗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방안이 너무 춥다보니 환기는 엄두도 못 냈다. 몇 달이 지난 뒤엔 꽤 두꺼운 얼음이 벽을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아침에 눈을 떠 전등을 켜면 천정의 얼음은 마치 살아 있는 수정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봄이 온 후에는 반대로 천정의 얼음이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한낮엔 마치 지붕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물방울이 곳곳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러다 밤엔 다시 꽁꽁 얼어붙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런 상황이 몇 달 계속되자 벽지에서 울긋불긋한 곰팡이가 온 방 안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단 한 채밖에 없던 이불은 늘 눅눅해 있었다. 상상 이상의 습기로 인해 벽지는 성한 곳이 없었고 심지어 이상한 냄새까지 나기 시작했다. 그즈음 내 몸에는 피부병으로 의심되는 두드러기가 자주 생겼다.

우리 삼 형제는 이 집에서 더는 살아가기 어렵단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모은 돈은 150만 원밖에 안 되었다. 다시 새집을 얻어 월세로 사는 건 부담이 컸다. 가능한지 알 순 없지만 우리는 돈에 딱 맞는 전셋집을 구해 보기로 했다.

며칠 뒤 가리봉시장 골목 끄트머리 낮은 언덕에 있던 대흥연립 지하로 결정이 났다. 그토록 바라던 전세로 이사를 했으나 사는 내내 생각지도 못한 불편을 겪어야 했다. 지하 연탄 창고를 개조한 탓에 허름한 방 부엌에선 위층에서 내려오는 하수구 냄새가 종일 풍겼다. 특히 외출했다 방으로 들어갈 땐 워낙 냄새가 심해 계절과 관계없이 출입문을 활짝 열어 놓고 환기를 시켜야 할 만큼 불편했다.

냄새야 환기를 시키면 된다지만 화장실이 집 주변에 없어 제때 용변을 볼 수 없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이 집을 계약할 당시 주인은 급하면 위로 올라와 화장실을 사용하라고 했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우리 스스로 '집주인에게 밉보이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게 그 집에서 오래 살 수 있는 비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집을 나와 언덕길을 100m쯤 걸어 올라가면 구로동으로 나가는 큰 길이 나온다. 그 길을 건너 허름한 판자촌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을 한참 걸어 내려간 지점에 공중화장실이 있었다. 우리 삼 형제의 전용 화장실은 이곳이 유일했다. 하지만 매일 새벽 아침 많은 이용객으로 긴 줄이 늘어서곤 했다. 가끔 새치기를 하는 사람 때문에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불편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회사 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기 전 가리봉시장의 여러 건물을 돌며 문이 열려 있는 화장실을 찾아 볼 일을 보고 들어갔다.

외상 3천 원의 부끄러움, 삶을 변화시키다

이런 불편은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도 사람인지라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배고픔을 참는 일은 무척 힘들었다. 모두가 한창 먹어야 할 나이였지만, 시골에서 제때 반찬을 조달하는 것이 어려워 식사를 제대로 해 먹질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회사는 아침과 점심을 제공해 주었다. 그 때문에 저녁 한 끼를 먹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굶어 죽을 정도는 아니란 생각으로 지냈다. 그러나 막상 일하고 집으로 돌아온 밤마다 배고픔을 견디기가 무척 힘들었다.

나는 연장 근무가 있는 날을 좋아했다. 연장 근무를 하면 회사에서 저녁은 공짜로 줬기 때문이다. 돈도 벌고 저녁까지 해결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었다. 집에서 쉬는 휴일이나 평일 밤 출출할 땐 라면을 끓여 먹었으나 당시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냄새 때문에 이마저도 맘껏 먹을 수가 없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변질된 라면을 헐값에 사 온 탓이었다.

그렇다고 멀쩡해 보이는 라면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이때 생각해 낸 것이 대파였다. 향이 강한 대파를 얇게 썰어 최대한 많이 넣고 끓였다. 역겨운 냄새가 덜 풍겼다. 가끔은 군것질도 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돈을 관리하는 큰형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큰형의 목표는 생활환경이 더 나은 전세로 빨리 옮기는 거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쓸데없는 소비를 최대한 줄여야 했다.

우리 삼 형제가 저녁을 먹지 않기로 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이런 마당에 군것질에 필요한 돈을 매번 호락호락 내어 줄 큰형이 아니었다. 만약 돈을 준다고 하더라도 한번에 5백 원 이상은 주지 않았다.

집에서 가까운 가리봉 시장에는 맛있는 것을 사다 먹을 수 있는 노점이 많았다. 우리는 주로 사과, 핫도그, 붕어빵, 국화빵 등을 사다가 먹었다. 돈 500원이면 어린아이 주먹만 한 사과 10개 또는 핫도그 10개를 사 먹을 수 있었다. 한창 먹을 나이였기에 1인당 3개씩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핫도그 10개를 사 들고 집으로 가던 길, 외상값을 갚지 못하고 피해다니던 튀김집 아주머니를 만났다. 살아오면서 그날처럼 부끄러웠던 적이 없었다.
ⓒ pixabay



심부름은 주로 막내인 내가 했다.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튀김 가게를 꽤 여러 번 이용하다 보니 나중엔 자연스럽게 외상 거래도 하게 되었다. 한 번에 5백 원씩 두어 달 지나고 보니 어느새 외상은 3천 원이나 되어 있었다. 가끔 길을 지나다 만난 튀김 가게 아주머니가 외상값 얘기를 했다. 하지만 큰형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돈을 주질 않았다. 온갖 힘든 심부름은 내가 다 하고 외상값 때문에 부담을 느끼는 건 오로지 나 한 사람뿐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 튀김 가게 앞을 지나다닐 수가 없었다. 한 보름 정도를 먼 길로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큰형은 이번에도 5백 원을 쥐여주며 먹을 것을 사 오라고 했다. 왠지 외상값이 깔린 튀김집으로는 도저히 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더 먼 곳에 있는 가게를 찾아갔다. 핫도그 10개를 사 들고 집을 향해 쫄래쫄래 걷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총각!'' 하고 불렀다. 처음에 내가 아닐 거로 생각했다. ''총각!'' 두 번이나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곳엔 나에게 외상을 해준 튀김집 아주머니가 벌겋게 불이 붙은 연탄을 들고 서 계셨다. 핫도그가 담긴 봉투를 등 뒤로 감추기엔 눈치가 워낙 빠른 분일 거란 생각이 들어서 이내 그만두었다. 아주머니는 나중 시간이 되면 가게에 들르란 말씀만 남기시곤 가버리셨다. 살아오면서 그날처럼 부끄러웠던 적이 없었다. 우리 삼 형제는 나이를 더 먹기 전에 이런 삶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나는 나의 삶이 부끄럽지 않았다

운전면허를 일찍 취득하게 된 원인도 조금 더 나은 환경의 직업을 갖기 위함이었다. 회사 일이 끝난 뒤엔 야간 학원에 다니며 공부도 했다. 그 결과 그토록 원하던 중·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할 수 있었다. 몇 년 뒤 국민학교 졸업이 전부였던 우리 삼 형제는 모두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1991년 봄 나는 국내 주택 보급 1~2위를 겨루던 회사의 직업훈련원을 거쳐 정직원이 되었다. 비록 내가 남들처럼 크게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역경을 딛고 꿋꿋이 살아 왔기 때문에 이런 과정들이 부끄럽지 않았다.

지금 제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고민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나의 이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현재의 20~30대가 살아가기 어렵듯, 그 길을 한발 먼저 걸어온 사람 대다수가 이와 같은 역경을 딛고 오늘의 삶을 빛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한다.

35년 전 나의 스무 살 구로공단 생활은 14살 소년 노동자로 살아온 보람 대신, 내실을 더 알차게 채워 가는 중요한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스물하나, 스물둘의 삶도 그렇게.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