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7월 17일 ~ 29일(13일)
장소 : 돌로미테(이탈리아)
제 2일차 : 07월18일 : 밀라노탐방 = 두오모 대성당(Duomo di Milano)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 , 스포르체스코 성 (Sforza Castle) ,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Church of Santa Maria delle Grazie)
베로나(Verone)탐방 = 로미오 와 줄리엣, 브라강장(Piazza Bra) , 베로나(Verone)시청 , 고대원영 경기장 아레네 디 베로나 ,
제 3일차 부터 트레킹 ~
돌로미티산맥(이탈리아어: Dolomiti, 라딘어: Dolomites, 독일어: Dolomiten, 베네토어: Dołomiti, 프리울리어: Dolomitis)은
이탈리아 북동부의 산맥으로 높이는 3,343 m이다.
산맥의 이름은 18세기에 이 산맥의 광물을 탐사했던 프랑스의 광물학자인 데오다 그라테 드 돌로미외(Déodat Gratet de Dolomieu)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남부 석회암 알프스 산맥의 일부를 형성하며 벨루노현, 볼차노현, 트렌토현에 걸쳐 있다. 산맥의 지형은 백운암 지형을 띤다.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제 3일차 07월19일(트레킹 1일차) : 파올리나산장(Paolina.2125) - 바엘산장(2283) - 치골라라데고개(Cigoade.2250) - 바욜렛산장(Vajolet2243)
트레킹 거리 : 12km
트레킹 시간 : 5시간 ( 트레킹시간 외 버스 & 리프트탐승 시간 1시간소요 )
제 4일차 07월20일(트레킹 2일차) : 바욜렛산장(Vajolet2243) - 프린스페고개 - 안테르모이아 - 캄피텔로
트레킹 거리 : 19km
트레킹 시간 : 7시간
제 5일차 07월21일(트레킹 3일차) : 캄피텔로 - passo gardena - 포스데실레스고개(Forces de sielles.2505) - 푸에즈산장(Puez)
- 몬티젤라(2660) - 가르데나치아 산장(Passo Gardena.2137)
트레킹 거리 : 15km
트레킹 시간 : 6시간 ( 트레킹시간 외 택시로 1시간이동 후 산행 )
제 6일차 07월22일(트레킹 4일차) : 팔자레고패스(passo falzarego) - lagacio - 파네스산장(Fanes)
(가르데나치아 산장(Passo Gardena.2137)에서 20분 트레킹 후 리프트탐승 후 택시 1시간 이동 후 케이블카이용 후 산행시작)
트레킹 거리 : 16km
트레킹 시간 : 6시간30분
제 7일차 07월23일(트레킹 5일차) : 파네스산장(Fanes) - 페데뤼산장(Rifigio.Pedurṻ.1548) - 쿠평원(Plan Pescṻ)
- 세네스 산장(Rif.Mont de Sennes.2176)
트레킹 거리 : 12km
트레킹 시간 : 6시간
제 8일차 07월24일(트레킹 6일차) : 세네스 산장(Rif.Mont de Sennes.2176) - 코르티나지역 - 프라토 피아짜(Prato Piazza)
트레킹 거리 : 15.5km ( 2km 정도 궤적저장을 깜빡 )
트레킹 시간 : 7시간 ( 2km 포함)
제 9일차 07월25일(트레킹 7일차) : 프라토 피아짜(Prato Piazza)
트레킹 거리 : 9.5km
트레킹 시간 : 4시간30분
제 10일차 07월26일(트레킹 8일차) : 발란드로산장(Rif.Vallandro) - 스페치에봉(Mont.Specie.2370) - 트레치메(Trecime 2999) - 코르티나(Cortina)
트레킹 거리 : 11.5km ( 버스로 1시간 이동하여 )
트레킹 시간 : 4시간30분
트레킹 후 : 코르티나담베쵸(Cortina d'Ampezzo)탐방
제 11일차 07월27일 : 베네치아탐방
산 마르코 광장 , 산 마르코 성당 , 두칼레 궁전 . 탄식의 다리 , 등
제 11일차 07월27일 : 페렌체탐방
두우모 꽃의 성모마리아 성당 , 시뇨리아광장 ,
피렌체(이탈리아어: Firenze, 영어: Florence)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주의 주도이다. 피렌체현의 현청 소재지이며, 인구는 38만명이고 근교의 인구까지 합치면 총 약 150만명이다. 토스카나 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 피렌체는 아르노 강변에 위치해 있으며 역사상 중세, 르네상스 시대에는 건축과 예술로 유명한 곳이었다. 중세 유럽의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으며 종종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본고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오랜 세월동안 메디치 가문이 다스렸고, 1865년에서 1870년까지는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였다. 매년 수백만이 넘는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있으며, 1982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선정되었다.
피렌체는 로마의 도시로 기원을 하였으며, 번영한 무역업과 중세시대 코무네 금융업의 중심지로서 오랜 세월을 보낸 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탄생지가 되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피렌체는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 유럽과 전세계의 도시들 중에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가장 핵심 도시 중 하나라고 말한다.
14세기 이곳에서 통하던 언어는 이탈리아어이다. 이탈리아 문학 황금기의 대부분의 모든 작가들과 시인들은 다른 지역의 방언들을 제치고 피렌체 방언을 문학 언어로서 채택을 결정적으로 이끌어냄으로서 피렌체와 관련이 있다.
중세 시대를 시작으로, 피렌체의 자본(황금으로 된 플로린)은 영국에서 브뤼허, 리옹, 헝가리에 이르는 유럽 전역의 경제 발전에 자금을 댔다. 피렌체 은행가들은 백년 전쟁 동안에 잉글랜드 왕에게 자본을 대기도 하였고, 마찬가지로 아비뇽 수도 건설과 로마로 귀환 후, 로마의 재건과 사업등 교황청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피렌체는 이탈리아 귀족 역사상 가장 중요한 귀족 가문인 메디치 가문의 고향이기도 하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15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정치적 문화적 마스터 마인드로 뽑힌다. 메디치 가문은 두 명의 교황을 배출해내기도 했는데, 이들은 16세기 초의 교황 레오 10세와 교황 클레멘스 7세이다. 카테리나 데 메디치는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와 혼인하였으며, 1559년에 그가 사망한 후, 프랑스의 섭정으로서 군림했다. 메디치 가문은 1569년 코시모 1세 데 메디치를 시작으로 토스카나 대공으로 군림했으며, 1737년 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의 사망으로 막을 내렸다.
에트루리아인들은 기원전 200년 피에솔레(라틴어로는 파이술라이[Faesulae] )의 정착지로서 소규모의 정착지를 세웠으나, 로마의 평민파들이 지원을 한 보복으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기원전 80년에 파괴시켰다. 오늘날의 피렌체는 기원전 59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그의 베테랑 병사들을 위한 정착지로서 건설하였고 본래는 플루엔티아(Fluentia)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이곳이 두 강 사이에 지어져 나중에 플로렌티아(Florentia, 흐름)라 바뀌게 되었다. 이곳은 현재의 레푸블리카 광장이 교차되는 카르도, 데쿠마누스로 된 주요 거리에 있는 군영 형식으로 지어졌다. 로마와 북방 사이에 있는 주요 길인 카시아 가도에 위치해있었고, 아르노의 비옥한 계곡에 있어, 이 정착지는 빠르게 중요한 상업 중심지가 되어갔다.
몇 세기가 지나, 플루렌티아는 동고트인들의 지배라는 격동의 시기를 겪었고, 이 기간에 동고트인들과 비잔티움 사이에 전쟁 문제를 자주 맞이했으며, 이는 대략 1,000명의 인구 감소를 야기했다. 평화는 6세기 롬바르디아족 통치시에 비로소 돌아왔다. 피렌체는 774년 샤를마뉴에게 정복되었고 루카를 수도로 하는 토스카나 공국의 일부가 되었다. 인구는 다시 성장하고 상업이 번영하기 시작했다.
우고(Ugo) 변경백은 서기 1000년에 피렌체를 루카를 대신한 그의 거주지로 택하였다. 피렌체 미술의 황금기가 이 무렵에 시작되었다. 1013년에 산 미니아토 교회(Basilica di San Miniato al Monte) 건설이 시작되었다. 산 조반니 세례당의 외부는 1059년과 1128년 사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이 기간은 또한 피렌체의 옛 강력한 경쟁 상대인 피사가 쇠퇴한 시기(제노바에게 패배하고 1406년에 피렌체의 지배하에 놓임)이기도 하며, 자노 델라 벨라(Giano della Bella)가 이끈 반귀족주의 운동에 따른 전문 상업계가 선도한 힘의 성장이 이뤄져, 그 결과로 오르디나멘티 디 주스티치아이 세워졌다.
1348년 흑사병 이전 인구는 94,000명으로 추측되며,[6] 그 중 25,000명이 피렌체의 양털 산업에 종사했다고 전해진다. 1345년에 피렌체는 양털 노동자들(이탈리아어로 치옴피[ciomi])에 의한 문제를 직면하게 되는데, 1378년에는 치옴피의 난에서 과두 정치를 상대로 잠깐의 폭동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들을 진압시킨 후,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의 격렬한 경쟁 상대인 알비치 가문의 영향하(1382–1434)에 놓였다.
15세기에 피렌체는 부와 경제적 성공을 거뒀다고 여겨진 유럽의 도시 중 가장 거대하였다. 거주민들의 삶이 모두가 목가적인 것이 아니듯이, 그들 사이에 큰 부의 차이가 있었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이전의 피렌체에서 도시의 중요한 통제권을 가져온 메디치 가문의 첫 번째 인물이다. 도시가 형식상으로는 민주주의 체제를 지녔지만, 그의 권력은 젠타 누오바(gente nuova, 새로운 사람들)라는 새로운 이주민들과의 동맹이 구축해논 거대한 후원망에서 나왔다. 메디치 가문원은 교황에게 그들의 통치력에 기여를 한 은행가이기도 했다. 코시모는 그의 아들 피에로에게 자리를 물려주었으나, 곧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에게 1469년에 넘어갔다. 로렌초는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보티첼리등에게 작품을 의뢰하는 위대한 예술 후원가였다. 로렌초는 음악가로서도 재주가 많았고 알렉산더르 아흐리콜라, 요한네스 기셀린, 하인리히 이자크 같은 작곡가와 가수들을 피렌체로 불러들였다. 동시대(그 이후) 피렌체인들은, 그를 "로렌초 일 마니피코"(Lorenzo il Magnifico, 위대한 로렌초)로 기억하고 있다.
1492년에 로렌로 데 메디치가 사망한 후, 그의 자리는 아들인 피에로 2세가 이어받았다. 프랑스 국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 북부를 침략했을 때, 피에로 2세는 그의 군대와 함께 저항하기로 택했다. 피사의 성문 앞에 있는 프랑스군의 규모를 깨닫자, 프랑스 국왕의 굴욕적인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는 피렌체 폭동을 일어나게 하였고 그들은 피에로 2세를 1494년에 몰아내버렸으며, 메디치 가문의 첫 통치는 공화정 정부의 복원과 함께 막을 내렸다.
이시기에 도미니코회 수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1490년 산 마르코 수도원의 프라이어가 되었다. 그는 그가 본 부도덕성이 널리 퍼지고 물질적 부유에 대한 집착을 꾸짖는 회개 설교로 유명해졌다. 그는 메디치 가문의 추방을 그들의 타락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 비난하였다. 그는 정치적 개혁을 통해 더욱 민주적인 통치를 이끌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사보나롤라가 공개적으로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부패를 고발하자, 그는 연설이 금지되었다. 그가 이 금지 사항을 어기자, 그는 파문되었다. 그의 극도의 가르침에 지친 피렌체인들은 그에게 등을 돌려 체포하였다. 그는 이단으로 유죄를 판결받아, 1498년 5월 23일 화형당하였다.
두 번째로 흔치 않은 독특한 통찰력을 지녔던 이는 자주 정치적 편의주의의 합법과 심지어 위법행위를 통해서라도 강력한 군주권하에서 피렌체의 재건을 처방했던 니콜로 마키아벨리였다. 다시 말해서, 마키아벨리는 통치와 권력 행사를 다룬 그의 정치 안내서 군주론로 가장 잘 알려진 사상가다. 메디치 가문의 의뢰를 받아, 마키아벨리는 또한 도시의 역사를 담은 피렌체 역사서도 집필했다. 피렌체인들은 메디치 가문을 두 번째로 몰아내고 1527년 5월 16일 공화국을 재건국한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교황의 지원을 받아, 1537년에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세습 공작이 되었으며, 1569년에는 두 세기를 지배한 토스카나 대공작이 되었다. 토스카나 전역에서 루카 공화국(시간이 흘러 공국)과 피옴비노 후국만이 피렌체에서 독립 상태로 남았다.
메디치 가문의 단절과 1737년에 로렌 공작이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 1세의 즉위는 토스카나를 일시적으로 오스트리아 왕령지에 포함하게 하였다. 이는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의 분가 가문이 되었고, 1801년 부르봉파르마 가에게, 1807년 12월 프랑스가 토스카나를 병합하면서 폐위된다. 피렌체는 1808년부터 나폴레옹이 몰락하는 1814년까지 프랑스 아르노 데파르망의 행정 구역이였다.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은 빈 회의를 통해 토스카나 대공 작위를 회복하지만, 1859년 마침내 폐위되었다. 토스카나는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의 행정 구역이 되었다.
피렌체는 1865년에 토리노를 대신해 이탈리아의 수도 기능을 대신하였으며, 도시를 현대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피아자 델 메르카토 베키오(Piazza del Mercato Vecchio)에 있는 옛 상가들과 많은 중세 주택들을 허물고 신식 주택과 전체적인 계획 거리로 대체하였다. 피아자(광장, 처음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이름이 붙었으나, 현재는 레푸블리카 광장[공화국]이라고 불림)는 눈에 띄게 넓어졌고 거대한 개선문이 서쪽에 세워졌다.
이탈리아의 두 번째 수도인 페렌체는 6년 뒤 로마를 지키던 프랑스군의 철수로 이탈리아 왕국에 추가될 가능성이 생기며 로마로 대체되었다.
인구가 두 배가 증가한 19세기가 지난후에 관광업, 상업, 금융업, 산업의 발전으로 인한 결과로 피렌체의 인구는 20세기에 들어 3배 가까이 증가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동안에 피렌체는 오랜 기간 독일군의 점령기(1943–1944)를 겪었고 무방비 도시로 선언되었다. 토스카나에서 활동하다 독일군에 사망한 연합군 병사들은 도시 외곽에 있는 묘지들에 묻혀있다(미군은 도시 남쪽에서 9km 거리, 영국군과 영연방군들은 아르노 오른쪽 제방 중심부의 동쪽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 1944년 퇴각하던 독일군은 영국군이 건너는 것을 어렵게 하기 위해 올트라노(Oltrarno) 지구와 도시의 나머지 지역을 연결하던 아르노 강에 있던 다리들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하를레 슈타인하우슬린(Charle Steinhauslin)이라는 독일군 장군이 베키오 다리의 역사적 가치를 고려해 부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에 베키오 다리 남쪽을 따라 바로 있던 바사리 코리도르 같은 역사 지구의 거리들은 지뢰밭으로 사용되어 파괴되었다. 그 이후 아르노 강을 연결하던 다리들은 가능한 남아있는 재료들을 최대로 이용해 원래의 형태로 복원하였지만, 베키오 다리 주변 건물들은 현대와 옛 스타일을 혼합한 형식으로 재건되었다.
1945년 5월 유럽 전선이 끝나면서, 미군의 정보와 교육 부서들은 이탈리아 피렌체에 제대한 미국 남녀들을 위한 해외 대학교를 세웠다. 전역자를 위한 최초의 미국인 대학교는 1945년 6월 이탈리아 피렌체에 세워진 항공 학교(School of Aeronautics)였다. 7,500명의 병사-학생들은 한 학기에 4달 간의 교육을 거쳐 대학교를 들어갔다(G.I. American Universities).
1966년 11월 아르노 홍수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많은 예술품에 피해를 입었다. 도시 벽들에 있는 조그만한 플래카드들은 홍수 당시에 물이 얼마까지 차 올랐는지를 나타낸다.
피렌체는 카레지, 피에솔레, 세티냐노, 아르체트리, 포조임페리알레, 벨로스구아르도 (피렌체) 언덕이 형성한 분지에 있다. 아르노 강과 세 개의 다른 강들을 이곳을 거쳐 흐른다.
피렌체는 온난 습윤 기후 (Cfa)를 지녔으며, 약간의 지중해성 기후 (Csa)도 있다. 평균 또는 적은 강우를 지닌 여름과 시원하고 축축한 겨울이 특징이다. 피렌체는 항풍이 없어, 여름 기온은 해안가보다 높다. 여름 시기에 강우는 대류우인 반면에 겨울에는 기복있는 강우 형태를 띈다. 강설은 거의 매년 이루어 지고 있지만, 땅에 쌓이지는 않는다. 공식적인 최고 기온은 1983년 6월 26일에 42.6와 최저 기온은 1985년 1월 12일의 -23.2이다.
피렌체 지방 자치 당국의 입법부는 비례제로 5년에 한번 씩 뽑힌 36명의 의원으로 이뤄진 시의회(Consiglio Comunale)이다. 행정부는 시장이 뽑은 7명의 평가인들로 이뤄진 시의원회(Giunta Comunale)이다. 가장 최근의 시장은 다리오 나르델라다.
피렌체 지방 자치 당국은 5개의 행정 자치구(Quartieri)로 나뉜다. 각 행정 자치구는 의회(Consiglio)와 피렌체 시장에게 선출된 의회장의 관리를 받는다. 도시 조직은 이탈리아 헌법의 지배를 받는다. 자치구들은 피렌체 시장에게 여러 주제(환경, 공사, 대중 보건, 지역 상권)의 구속력 없는 의견 조언과 시의회가 그들에게 위임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 추가적으로 지방 활동에 자금을 대도록 자치적인 지원을 한다
이동중 이탈리아 농촌의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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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우모 꽃의 성모마리아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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