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타이완 지구를 실효 지배하는 국가로 1970년대 이전까지 중국 혹은 자유중국으로 불리던 국가에 관한 것입니다. 이 나라가 통치하는 지역(섬)에 대해서는 타이완 문서를, 다른 뜻에 대해서는 중화민국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중화민국(중국어 정체: 中華民國, 주음부호: ㄓㄨㄥㄏㄨㄚˊㄇㄧㄣˊㄍㄨㄛˊ)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공화국이다.
1912년 신해혁명 이후 중국 대륙에 세워진 공화국이다. 건국 초기에는 내분과 외침 등으로 인해 불안하였고, 1949년 국공 내전으로 영토의 상당 부분을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잃어 타이완 등 몇 가지 도서 지역만을 통치하는 상태로 현재에 이른다. 정식 국명은 '중화민국'이나, 대외적으로는 '타이완'이 병기되거나 국명을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중화민국은 1912년 쑨원의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워진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이며, 중화민국 헌법은 정치적인 진통을 겪다가 1947년에서야 공포되었다. 국공 내전 중 1949년 10월 1일에 마오쩌둥을 위시한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한 이후에 기존의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는 타이베이 시로 이전했으며(국부천대), 중화민국의 실질적인 영토도 타이완(타이완 성 포함) 및 푸젠 성 일부로 축소되었지만 현재까지 안정적으로 국가를 유지해오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중화민국의 영토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타이완은 17세기에 청나라의 푸젠 성에 속했던 지역으로, 1885년에는 푸젠 성으로부터 분리된 타이완 성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였고, 이로 인해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만주, 펑후 제도와 함께 일본 제국에 할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1945년에 만주와 타이완, 펑후 제도를 중화민국의 영토로 수복하게 되었고, 1947년 공포된 중화민국 헌법에 따라 타이완 성이 다시 설치되었다.
1949년 중국 공산당과의 국공 내전의 영향으로 중국 국민당은 난징 시에 있던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베이 시로 이전[1]하였고, 1955년을 기해 중국 본토에 대한 통치권을 완전히 중화인민공화국에 빼앗김에 따라 중화민국 정부 소재지인 타이완은 더 이상 중국의 변두리 지역이 아닌 중화민국의 중심 무대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이 나라는 통상 타이완(臺灣, Taiwan; 대만)으로 불리기도 한다.
1949년 이래 국공 내전을 계기로 중화민국은 이미 국공내전에서 패한 채 망명되었고, 따라서 이 나라와 중국 대륙에 있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를 흔히 양안이라고 일컫는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에 중화민국이 멸망하였으므로 중화민국이 가진 모든 권리의 승계를 주장하고 있으며, 반대로 중화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 공산당의 반란으로 세운 불법 정권으로 간주하여 본토 수복을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재통일에 관한 문제는 타이완 독립 세력까지 존재하고 있어 더욱 복잡한 양상이다.
정식 국호는 중화민국(中華民國)이며, 자국 내에서는 타이완(台灣)이라고 부른다. 중국(中國)이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는다. 또 영어로는 Republic of China, 약칭은 ROC이다. 그러나 1971년 중화민국이 유엔 회원국 지위를 잃은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으로 부르는 빈도가 훨씬 많아지면서, 통상적으로는 중화민국의 현재 남아있는 영토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지명을 따서 타이완(대만, 영어: Taiwan, 중국어(타이완): 臺灣)이라고 부르는 일이 더 흔해졌다. 과거 냉전시절 미국이나 대한민국 등 친서방 국가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즉 중공(中共, Communist China)과 구분하기 위하여 자유중국(自由中國, Free China) 또는 중국(中國, China)이라고도 불렀으나 탈냉전 이후부터는 빈도가 감소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주장하며 타이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중화민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83년 6월 26일, 덩샤오핑 이론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 타이완 특별행정구(中華人民共和國台灣特别行政區)[2]라는 이름을 제시하였고, 타이완 지구를 홍콩, 마카오와 같은 자국의 특별행정구처럼 간주하고 있다. 이런 중국의 압력에 의하여, 중화민국은 중화 타이베이(Chinese Taipei, 中華臺北 또는 中華台北)라는 별칭을 1980년대부터 올림픽 등의 국제 대회나 국제기구 등에서 사용하고 있다. 단, 세계 무역 기구(WTO)에서 중화민국의 가맹 명칭은 타이완·펑후·진먼·마쭈 개별관세영역(臺灣·澎湖·金門·馬祖 個別關稅領域; Separate Customs Territory of Taiwan, Penghu, Kinmen and Matsu; 台澎金馬個別關稅領域)이다.
2008년 6월 4일 어우훙롄(毆鴻煉) 중화민국 외교부장은 국제기구 등에서의 '중화 타이베이(Chinese Taipei, 中華臺北)'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방침이라고 밝혔다.[3] 반면 중화민국 감찰원에서는 중화민국 행정원의 정부 문서에서 ‘대만’의 사용 빈도가 높아진 것을 지적하였으며 ‘중화민국’이라고 명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1911년 우창 봉기를 계기로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에 참여한 단체들은 손중산을 임시 대총통으로 삼았으나,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 자리를 양보하였다. 그러나 권력욕에 가득 찬 위안스카이는 중화제국을 선포한다. 일본 제국이 요구한 21개조 요구를 계기로 5·4 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위안스카이는 제정을 폐지하였으며, 대총통 자리에서도 물러났다. 손중산과 장제스를 중심으로 한 중국 국민당은 중국 공산당과 손을 잡고 광저우 시에 새로운 혁명정부를 수립하였다. 이후 북벌 과정에서 장제스는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원을 축출했다.
북벌을 완료한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은 중화민국의 수도를 난징 시로 천도한다. 점차 정부의 권력이 중국 국민당에 집중되면서 국민당의 일당 독재가 시작된다. 이에 대항해 중국 공산당이 장시 성에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세웠으나, 3년만에 제압된다. 그 후 일본 제국이 만주 사변을 일으키고, 중일 전쟁이 시작된다. 이 때문에 중국 본토 전체가 전장이 되었다. 1937년 수도 난징이 일본 제국에 점령당했다. 국민정부는 난징을 탈출, 충칭 시로 도피했다. 일제는 난징 대학살을 일으킨다. 1940년에는 친일 성향의 신정부가 왕징웨이에 의해 수립된다. 그러나 분전 끝에, 결국 일본 제국을 중국 본토에서 몰아내고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 된다. 중화민국은 유엔에 가입하여,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 된다.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중일 전쟁에서 국공 합작을 맺고 일본 제국에 맞서 함께 싸웠다. 일본 제국의 패망 후 양 당은 공동의 적을 잃었기 때문에 양 당 사이의 내전 가능성이 계속 제기되었다. 하지만 양 당은 미국, 소비에트 연방의 중재로 쌍십협정(雙十協定)을 맺음으로써 화해하는 듯 했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의 내정에 중립을 표방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중화민국 정부와 중국 국민당을 지원했으며 소비에트 연방 또한 국민당을 지원하고 공산당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협정을 국민 정부와 체결하면서도 비밀리에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였다. 결국 국민당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난징 시에서 공산당을 배제한 채 1947년정부를 재수립했으며 공산당이 이에 반발하면서 중국 곳곳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국민당은 결국 공산당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하였지만 공산당의 끈질긴 노력과 국민당에 등을 돌린 중국 인민의 민심, 전략의 실패, 그리고 경제 정책의 실패 등 여러가지 악재로 인해 중국 본토를 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내주고 타이베이로 정부를 이전한다.
1949년 국공 내전으로 인하여 난징에 있던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베이로 이전한 장제스 총통은 중국 공산당과의 대립을 이유로 국가적인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사 독재를 펼친다. 중국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후 타이완으로 거점을 옮긴 중화민국은 미국과의 협정을 통해 약 30년 간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하여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1971년 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에 따라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뿐만 아니라 국제 연합 내에서의 '중국' 대표권을 모두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빼앗겼고, 연이어 전세계의 냉전 체제가 해빙기를 맞으면서 미국을 위시한 제1세계 국가들이 점차 중화민국 단교를 전제로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함으로써 중화민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했다.
세계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향력이 급속히 확대되면서, 중화민국의 실지 수복은 사실상 요원해졌다. 이에 타이완 토착세력인 본성인을 중심으로 '탈중국화'를 주장하는 세력이 태동하였고, 현재 중화민국의 내정은 중국 통일을 추구하는 보수적인 범람연맹과 타이완의 새로운 주권 국가를 추구하는 진보적인 범록연맹으로 양분되었다. 이런 갈등은 본성인과 외성인 간의 갈등으로 비화되어 심각한 사회적 문제까지 야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1992년부터 중화민국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92컨센서스'(92共識)에 따라, 통일이나 독립을 추구하지 않으며 무력을 사용하지도 않는다는 원칙인 이른바 3불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타이완 공화국을 염원하는 세력의 거두인 민주진보당의 천수이볜이 집권하여 정책적으로 추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중화인민공화국은 2005년 반분열국가법을 제정하여 하나의 중국을 벗어나 독립을 선언하면 무력 침공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리덩후이와 천수이볜이 총통으로 재임하던 시기에는 양안 관계가 냉각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홍콩 출신인 중국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마영구)가 총통으로 재임하는 시기에는 양안 관계가 조금씩 개선되는 편이었다.
내전으로 분단된 이래 이념을 달리한 양 정부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하며, 각자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1945년 10월 25일에 창설된 유엔에서 중화민국은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를 가진 주요 회원국이었다. 그러나 국공 내전으로 인해 중국 공산당이 건국한 중화인민공화국을 지지하던 당시의 공산주의 국가들은 “유엔 헌장 서명국이자 제2차 세계 대전 승전국인” 중국의 법통은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승계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유엔은 1971년 10월 25일 개최된 총회에서 표결하여 2758호 결의가 채택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국이 가지고 있던 유엔 내 중국 대표의 모든 권리와 지위를 취득하였다. 유엔을 탈퇴한 중화민국은, 이 결의 채택으로 말미암아 유엔 내부뿐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중화민국에게 불리한 조건에 놓이는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반면 타이완 지역의 본성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차 확대됨에 따라, 기존의 중화민국이 아닌 타이완 공화국을 건국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하였다. 특히 이러한 움직임은 민주진보당의 천수이볜이 야당 출신 후보 중 최초로 총통에 집권했을 때 급진하였으나, 중국 국민당의 마잉주로 정권이 교체되고 전임 총통인 천수이볜이 부정비리에 휩싸여 구속되는 등의 사건을 거치면서 이러한 탈중국화 운동은 지지도가 다소 감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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