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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터 섬 지도 정보

정상고집 2016. 5. 10. 10:57

이스터 섬(영어: Easter Island, 스페인어: Isla de Pascua 이슬라 데 파스쿠아[*], 문화어: 빠스꽈 섬)은 태평양에 위치해 있는, 칠레령의 섬이다. 이스터 섬 주민들은 라파누이(Rapa Nui ‘커다란 땅’)라고 부른다. 수도항가로아이며 행정 구역상으로는 발파라이소 주 이슬라데파스쿠아 현에 속한다.

 

 

 

이름의 유래

라파누이 바깥의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섬의 발견은 1722년 4월 5일에 네덜란드의 사령관 야콥 로게벤에 의한 것이다. 오후 5시가 될 무렵이었다. 섬을 발견한 것은 로게벤이 지휘했던 세척의 배 가운데 하나인 아프리카안쉬 갈레이호였다. 이 배의 항해일지는 첫 발견을 이렇게 적어놓았다.

 

오후 시계로 모래시계를 열 번째 쟀을 즈음, 앞에서 항해하던 아프라카안쉬 갈레이호가 바람을 가르며 나아갔다.(중략)...육지가 보인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낮고 편평한 섬 하나가.…우리는…그 섬에 파슈 에일란트(Paasch Elyland, 영어: Easter Island)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섬을 발견하고 찾아낸 날이 부활절 날이기 때문이다.

 

이스터 섬의 원주민들은 이 섬을 라파누이(Rapa Nui)라 부르는 데 커다란 땅이란 뜻이다.

 

지리

이스터 섬은 태평양의 동부 한 가운데에 있다. 또한 이스터 섬은 칠레에 속해 있다. 이스터 섬은 칠레로부터 약 3,700 km, 핏케언 제도로부터 2,075 km 떨어져 있다.

이스터 섬은 대략 삼각형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는데 꼭짓점에 해당하는 세 개의 화산과 70여 개의 측화산이 분출하면서 섬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플라이스토세에 섬의 기반을 이루는 라노 카우 화산과 포이케 화산이 분출하였고, 이후에 플라이스토세에서 플라이오세 사이에 순상 화산인 테레바카 화산이 분출하였다. 이스터 섬의 북단에 있는 테레바카 화산은 이 섬의 가장 큰 산이다. 가장 높은 곳의 높이는 해발 510m 정도이다.

남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솟아오른 이스터 섬의 표고는 높지 않으나 주변 수심은 무척 깊은 편이다. 섬으로 부터 200m 떨어진 곳의 수심도 약 1,000m에 달하며 화산 경사면이 끝나는 지점의 수심은 8,000m에 달한다.

현재 이스터 섬에서 보이는 암석의 범위는 놀랄 만큼 폭넓은데, 섬에 있는 세 곳의 봉우리는 주로 현무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라노 카우 절벽에는 육각 기둥 모양의 주상절리가 관측된다. 라노 카우 주변과 모투 이티 주변의 지층에는 화산유리인 흑요암이 다수 발견되며, 그 유명한 모아이를 조각한 암석은 라노 라라무의 응회암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해안 절벽을 따라 많은 용암 동굴이 관측된다., 테라비카에서는 용암동굴의 천장이 몇 차례 무너져 길이가 10m 이상씩 되는 동굴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리고 무너져 내리지 않고 남아 있는 동굴 가운데는 두께가 30 cm 정도까지 얇은 동굴도 있었다. 이렇게 동굴이 풍부하여 빗물의 대부분이 지하로 스며들기 때문에 섬의 넓은 지역이 습기 없이 메마른 모습을 띄게 만든다. 실제로 이 섬 어디를 가더라도 지속적으로 땅 위를 흘러가는 시내나 개울은 하나도 찾을 수 없다. 물론 비가 많이 내릴 때에는 테라바카에서 바다 쪽으로 단속적으로 흘러드는 개울물이 있기는 하지만 중앙에 높은 고원이 없기 때문에 침식으로 형성되는 작은 협곡도, 개울이나 계곡도 형성 될 수 없다.

이스터 섬의 해안선은 폴리네시아 제도에 속한 섬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산호초가 적다. 물론 작은 산호충들이 자라긴 하지만 바닷물의 온도가 겨울에는 섭씨 21℃까지 떨어지기 때문에 산호초를 이루는 타입의 산호충들이 살아가기에는 너무 낮은 온도이다. 이는 폭풍우가 몰아치면 해안에 보호벽이 전혀 없다는 의미기이 때문에 포이케, 라노 카우 주변과 테라바카의 북쪽 지역에 300m 높이에 달하는 가파른 절벽이 생겼다. 오직 남쪽 해안만 이런 규모의 침식을 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남쪽 해안은 부드럽고 완만하게 경사를 이룬 해안선이 폭넓게 흩어져 있다.

해안선에는 놀랄 만큼 모래 해변이 드물다. 오직 북쪽 해안에 있는 아나케나에서나, 또는 좀 덜 알려진 라페루즈 만 근처에서만 모래 해변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대부분 지역에서 카누보다 큰 선박은 정박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스터 섬에 전래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섬을 최초로 발견한 호투 마투아는 아나케아에 정박하기 전에 두 척의 카누에 타고 섬을 한 바퀴 돌았다고 한다.

 

 

 

 

기후

이스터 섬은 온난 습윤 기후가 나타난다. 연평균 기온은 계절이 바뀔 때 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섭씨 20.5℃이다. 가장 따뜻한 시기는 1월과 2월이고, 기온이 23.4℃이다. 그리고 가장 서늘한 시기는 7, 8월로서 17.8℃의 기온을 나타낸다. 낮과 밤의 일교차도 심하지 않고 적절하며 서리가 내린다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년 내내 내리는 강우는 다소 불규칙하고 연평균 강우량은 1,198mm이다. 가장 습한 시기는 보통 3월에서 6월에 이르는 때이고 습한 시기인 하지만 가뭄이 여러 달에 걸쳐 나타나기도 한다. 보통 가장 건조한 시기는 9월이다. 강우량 또한 해마다 크게 차이를 보인다. 1948년에는 강우량이 1,550mm였으나, 1953년에는 766mm에 불과했다. 달에 따라서도 강우량의 변동은 심한 편이다. 섬의 크기가 작은데도 섬 전역이 다양한 강우 분포도를 보인다. 섬의 중앙 지역에는 북쪽 해안보다 훨씬 더 많은 비가 내리는데, 이것은 기온과 지형, 그리고 바람의 방향과 세기가 상호 작용한 결과이다.

이스터 섬은 바람이 아주 많이 부는 지역이다. 이곳에서 바람은 기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바람이 잠잠한 날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풍향은대체로 9월에서 5월 사이에는 동풍과 남동풍이 불고 나머지 시기 동안에는 북풍과 북서풍이 불어온다. 폭풍우가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다 괜찮은 항구가 없기 때문에 배가 오가는데 심각한 문제로 여겨져 왔다. 이스터 섬에는 바람이 완전히 차단되는 지역들이 있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지역이 라노 카우 분화구 안이다.

 

 

 

 이스터섬의 기후

 월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년 

 평균

최고기온℃ (℉)

 25 (77)

 26 (79)

 25 (77)

 24 (75)

 22 (72)

 21 (70)

 20 (68)

 20 (68)

 21 (70)

 21 (70)

 22 (72)

 24 (75)

 22.6 (72.7)

 평균

최저기온 ℃ (℉)

 21 (70)

 21 (70)

 21 (70)

 20 (68)

 18 (64)

 17 (63)

 16 (61)

 16 (61)

 16 (61)

 16 (61)

 18 (64)

 19 (66)

 18.3 (64.9)

 강수량 cm (inches)

 9
(3.5)

 8
(3.1)

 8
(3.1)

 11
(4.3)

 12
(4.7)

 10
(3.9)

 9
(3.5)

 8
(3.1)

 8
(3.1)

 7
(2.8)

 8
(3.1)

 9
(3.5)

 113
(44.5)

 

 

역사와 문화

이스터 섬의 원주민들은 약 2,900년 전부터 폴리네시아에서 카누로 이주하여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스터 섬에는 "짧은 귀" 부족과 "긴 귀" 부족이라는 경쟁적인 두 부족이 있었다.[7] 1722년 로헤벤이 이스터 섬을 방문하였을 당시 인구는 5-6천 명 정도였다. 1805년 미국노예 상인들이 22명의 원주민을 잡아갔고 1862년 페루의 노예 상인들이 이 섬의 지배 계층을 포함한 원주민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1877년 이스터 섬에는 110여 명의 원주민만이 있게 되었다

 

이스터 섬은 거대한 석상 모아이로 유명하다. 모아이는 초자연적인 현상의 존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소재이다. 이들은 이 석상이 외계인이나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세워졌다고 주장하고는 한다. 그러나 모아이는 이스터 섬의 원주민들이 세운 것으로 11세기에 가장 많이 만들어졌으며 17세기까지 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3.5 ~ 5.5m에 이르는 모아이는 약 900여 개가 이스터 섬 곳곳에 놓여 있다. 보통은 무게가 20 정도이나 큰 것은 10m의 높이에 무게도 90톤이나 되는 것도 있다. 모아이에 대한 초자연적인 전설은 이 섬을 방문한 로헤벤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나무가 한 그루도 없는 이 섬에서 어떻게 이런 거대한 석상을 세울 수 있었는지 놀라워했다. 1968년 스위스인 다니켄은 원주민과 면담결과 모아이가 외계인의 작품이라 주장하여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9][10] 그러나 과학적 조사 결과 이스터 섬에는 17세기까지도 나무가 무성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석상의 재질이 제주도돌하르방과 같은 화산암이어서 조각하기가 쉬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56년 노르웨이의 헤이엘다르는 12톤의 모아이를 나무로 된 도구만을 사용하여 섬 주민 180명과 한 달 만에 바닷가까지 옮겼다. 다시 조사한 이스터 섬의 주민들과의 면담에서 이들은 모아이가 '짧은 귀' 부족과 '긴 귀' 부족에 의해 새워졌다고 말하였다.

 

칠레 정부가 이스터 섬 원주민들에 대한 학대

칠레 정부가 이스터 섬 원주민들에 대한 학대는 매우 심각하여 사회문제로 거론되었다. 이스터 섬의 관광상품을 칠레인들이 독점하게 했으며 이 때문에 이스터 섬 원주민들은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인종차별 역시 심각한 문제로 칠레 본토인들이 2010년대인 현재까지도 이스터 섬 원주민에 대해 심각한 인종차별을 자행하고 있으며 칠레 정부는 이를 묵인하고 있다.

칠레 정부는 이스터 섬의 관광상품으로 꽤 이득을 보고 있지만 정작 이스터 섬의 원주민들에게는 이스터 섬의 관광산업에 종사하지 못하게 하여 생계유지에 어려움을 겪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이스터 섬 원주민들은 국제사회에 칠레로부터 독립을 요구하고 있지만 칠레 정부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이스터 섬의 원주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해왔다.

 

문자와 언어

이스터 섬 원주민들은 독자적인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그의 저서 《총 균 쇠》에서 이스터 섬의 문자 유물이 가장 오래된 것도 1851년의 것이란 점을 들어 이들의 문자가 1770년 스페인 함대의 침공이후에 만들어졌을 것이라 주장한다.

 

환경의 변화

현재의 이스터 섬에는 나무가 거의 없으나 원래는 다양한 나무가 자라는 숲이 우거진 섬이었다. 어떤 이유로 황폐화 되었다고 본다. 이 이유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환경과학자들은 이스터 섬의 원주민들이 어업을 위한 선박의 건조, 모아이 석상을 세우기 위한 도구의 제작등으로 소중한 자원인 나무를 고갈시켜버린 것이 이 섬에 기근을 가져왔고 그로 인해 기초적인 사회 유지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스터 섬은 1772년 무렵 이미 작은 나무 몇 그루 만이 있는 초원 지대가 되었다.

최근에 이와 반대되는 가설이 나왔다. 이스터 섬의 황폐화는 외부인 때문이라고 보는 설이다. 유럽인이 원주민을 노예로 끌고 가서 섬의 인구가 급속히 줄었다고 한다. 산림고갈 역시 유럽인들의 배에 섞어 들어온 쥐가 급속히 증가하여 야자나무 씨등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워서 섬의 황폐화를 가져왔다고 본다.

 

 

 

 

 

 

 

 

 

 

 

 

 

 

 

 

 

원주민이 사라진 이스터 섬의 비극(2014.9월호)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모아이’ 석상으로 유명한 섬, 이스터. 서울의 4분의 1정도 되는 규모로 칠레 본토에서 서쪽으로 3,700km 떨어져 있는 태평양의 작은 섬이다. 누구나 한 번쯤 들었을 법한 이 유명한 섬엔 왜 원주민이 살지 않는 것일까?

 

1722년 이 섬에 처음 상륙한 독일 탐험가들의 기록은 그 당시 식인습성을 지닌 원주민들이 약 5천여명 정도 생활하고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최대 무게가 100톤에 달하고 그 높이가 10미터를 넘는 규모의 모아이를 해안가에 건립할 만큼 똑똑했던 원주민들은 대체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이를 설명하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나 그 가운데 가장 신뢰할 만한 학설 중 하나는 생물다양성으로 풀리는 생태적 분석이다.

 

이 섬의 생태적 역사를 고생물학적 분석을 통해 살펴보면 최초 정착인은 폴리네시아인들로 그 시기는 서기 400년경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 섬에는 큰키나무(칠레에 분포하는 야자나무와 흡사한 나무로 추정)들이 번성했음이 화산분화구 늪지에서 발견한 꽃가루의 분석결과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 꽃가루는 1400년경에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다. 즉 섬에서 완전히 멸종된 것이다. 또한 섬의 곳곳에서는 돌고래와 조류의 뼈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들의 발견연대가 큰키나무와 일치한다. 즉 야자나무가 사라지면서 돌고래 뼈도 더 이상 출현하지 않은 것이다. 이때부터 원주민은 절멸의 과정에 진입한 것으로 분석결과는 추론한다. 연구자들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최초 원주민들은 삶의 터전인 고구마 경작지를 확보하기 위해 숲을 제거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수의 큰키나무가 지속적으로 벌채됐다. 이 나무들은 돌고래 사냥을 위한 배를 만드는 데 사용됐거나 모아이를 해안가로 운반하고 이를 건립하는 데 이용됐다.

 

같은 시기 숲속의 조류들도 주요한 먹이자원으로 활용됐고 이들의 알도 원주민들에게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인간에 의한 지속적인 벌채와 번성한 쥐들에 의한 큰키나무의 씨앗 훼손은 이들 군락의 유지에 요구되는 최소 한계점을 어느 순간 넘어서게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큰키나무의 절멸은 원주민으로 하여금 돌고래 사냥과 모아이 건립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는 식량 문제와 함께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돌고래 사냥이 불가능해지자 조류에 대한 식량의존해외사례도가 증가했고 이는 조류의 감소로 연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단백질 공급원의 감소로 인구 증가는 둔화되고 원주민의 수도 감소하게 된 것이다. 18세기 독일 탐험가가 도착했을 당시 이들이 식인습성에 의존해 살아온 것도 이 같은 과정에서 부족 간의 전쟁을 통해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타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과거 이스터 섬에 생육했던 큰키나무는 현재 지구상에서 멸종했으며 섬에 살았던 조류 25종 가운데 1종은 멸종, 최소 12종은 섬에서 절멸했다. 생물다양성 훼손의 궁극적인 영향은 원주민의 절멸로 귀결됐다.

 

이스터 섬의 비극이라고도 불리는 이 학설은 우리에게 생물다양성이 왜 중요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돌고래 사냥과 모아이 운송과 건립에 사용할 수 있는 큰키나무가 풍부하게 원주민과 공존했던 시기는 아마도 이스터 섬의 부흥기였을 것이다. 만약 그때 알맞은 규모를 지향하고 큰키나무 군락을 보존해 생물다양성을 유지했다면 이스터 섬은 자생적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생물다양성이란 우리 삶의 질 문제를 넘어서 생존과 직결된 화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