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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 제국 지도 정보

정상고집 2015. 12. 18. 14:53

 

 

잉카 제국

 

타완틴수유(케추아어: Tawantinsuyu)는 콜럼버스 이전의 아메리카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이다. 제국의 군주 칭호는 사파 잉카라 했으며, 이 군주 칭호를 따서 서양에서는 잉카 제국(Inca Empire)이라 일컬었다. 잉카 제국의 행정, 정치, 군사의 중심은 지금의 페루인 쿠스코이다. 이 제국은 13세기 초 페루의 한 고원에서 기원하였으며, 1438년에 본격적으로 역사시대를 맞이했다. 1438년부터 1533년까지 약 95년 동안 잉카는 무력 정복과 평화 조약을 적절히 사용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현재의 에콰도르, 페루, 남서 중앙 볼리비아, 북서 아르헨티나, 북 칠레, 그리고 콜롬비아 남부등 안데스 산맥을 중심으로 넓게 퍼진 방대한 남서 아메리카 대륙을 융합했다.

 

잉카 제국의 공식적인 언어는 퀘챠이다. 그러나 퀘챠 외에도 수백 개의 지역 방언과 사투리가 있었다. 퀘챠는 트완틴수유(Tawantinsuyu)라고도 한다. 퀘챠 표기법 개정 이전에는 타완틴수요(Tahuantinsuyo)라는 스페인어로 표기했다. 트완틴(Tawantin)은 넷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 tawa와 그룹이라는 의미를 지닌 접미사 -ntin, 지역 혹은 지방이라는 의미의 수유(suyu)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단어이다. , 퀘챠는 네 개의 지역 혹은 네 개의 지방 연합이라는 의미이다. 이름 그대로 잉카 제국은 네 개 수유로 나뉘어 있으며, 수유의 네 모서리는 수도인 꾸스꼬와 접해 있다.

 

각 지역에 다양한 우아까(Huacas)가 있었지만, 잉카 왕은 그의 권력을 이용하여 파차마마(Pachamama)와 같은 다른 신을 믿는 종교인들에게 태양신을 믿도록 종용하였다. 잉카 제국은 그들의 왕을 "태양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기원(신화)

잉카 제국에는 다양한 건국신화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다음과 같다. 창조의 신 티키 비라코차에겐 8명의 자녀들이 있었다. 그의 4명의 형제들(아야르 카치·아야르 오코·아야르 아이카·아야르 망코 )4명의 자매들은 다른 곳에 도시를 세우기 위해 빠까리땀보를 떠난다. 여행중 망꼬와 오꼴로 사이에 신치 로까가 태어난다. 신치 로까는 이들을 꾸스꼬로 인도한다. 그들은 꾸스꼬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망꼬 카팍이 꾸스꼬의 지도자가 된다.

 

또 다른 건국 신화는 다음과 같다. 태양의 신, 인띠는 깊은 호수 띠띠까까에서 망꼬 와 마마 오꼴로를 창조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새로운 도시를 건설 할 것을 명한다. 지하 동굴로 꾸스꼬까지 여행한 망꼬와 오꼴로는 꾸스꼬에 그들의 첫 번째 왕국을 건설하게 된다.

 

이러한 신화는 구전으로만 전해지다가 스페인 식민주의자들이 들어와서야 기록으로 남겨졌다. 몇몇 학자들은 잉카 제국인들이 이러한 신화를 매듭문자(quipus)로 기록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고학

안데스 문명은 그 어원이 안데스 산맥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 문화군이 발전하였던 지리적인 위치를 파악하는 데에 상대적으로 어려움이 적다.[1] 안데스 문명은 약 BC 1000년경 현재 푸나라고 불리는 페루의 고원지대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초기의 잉카족들은 유목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 거주지의 지리학적 위치는 잉카족들을 왜소하고, 땅달한 형태로 만들었다. 남자의 평균키는 약 1.57m였으며, 여자의 평균키는 1.45m였다. 또한, 그들의 폐활량은 다른 종족들 보다 3배이상 뛰어났다. 잉카족들은 다른 종족들보다 심장박동 속도가 느렸으며, 혈액도 2리터 이상 많았고, 핏속에서 산소를 나르는 헤모글로빈 수치 또한 다른 종족보다 두배이상 높았다.

 

고고학자들은 해발 5.300m 만큼 높은 알티플라노의 온대 지역에서 안데스 문명의 흔적을 발견했다. 잉카 족들의 신체 구조상 스페인 정복자들보다 키가 작았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분명 엄청난 고도에서도 잘 견딜 수는 신체 조건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 거주하던 이전 시대의 최고 지도자에 관한 이야기들이 전해오고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설의 수준일 뿐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잉카 제국이 첫 번째 문명 같지만, 잉카는 분명 다른 문명의 산물이다. 그 이전에 발전했던 다양한 문화에서 이미 잉카문화에 견줄만한 혹은 그보다 더욱 우수하였던 많은 문화들을 발견할 수 있다. "잉카 황금 유물"이라고 통상적으로 불리는 것들이 실제로는 잉카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안데스 학자들은 잉카제국 이전에 띠띠까까 호수 주변에서 약 500년간 종교 의식과 행정의 중심 도시으로써 매우 번영했던 띠와나꾸 문명을 발견했다.

 

잉카 제국의 첫 번째 통치자는 망꼬 카팍이다. 망꼬 카팍 이후 7번째 왕조까지 각각의 통치 기간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망꼬 카팍의 통치 기간을 1250년 부터 1438년까지 약 188년 가량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잉카 제국은 중앙 고원인 꾸스꼬에서 기원하여, 연안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아갔다. 그들은 태양신을 섬겼다. 그들의 관료 조직은 11개의 왕족 계층에 속하는 관리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들은 꼬야 혹은 여왕과의 근친혼을 통해서 권력을 세습하였다. 잉카 제국이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고산지대의 기후 조건 때문이다. 고산 지대인 잉카 제국의 자원은 라마, 알파카, 그리고 비큐나로 제한되어 있었다.

 

잉카의 9번째 왕조, 파차꾸띠 잉카 유빵끼가 1445년 띠띠까까 지역을 정복했다. 파차꾸띠 잉카 유빵끼는 잉카의 문명과 정복 지역의 문화를 잘 융합하여 발전 시켰다. 치무 문명이 그의 좋은 예이다. 파차꾸띠는 왕실의 인재들을 훈련시켰다. 그는 청동 전투 도끼, 끝은 돌 이나 청동으로 장식된 나무막대, 투석기, , 던지는 창, 활과 화살, 가죽으로 덮어씌운 나무 방패, 면이나 등나무류로 만든 헬멧, 그리고, 누빈 갑옷으로 군대를 중무장시켰다. 잉카 공직자들은 각각의 함락된 지역에 파견되었다. 함락된 지역 관리자의 아들을 인질로 잡아 꾸스꼬로 데려 감으로써 각 지역 관리자들에게 충성심을 요구 할 수 있었다. 파차꾸띠는 퀘챠를 공식언어로 선포하였고, 함락된 지역의 종족들이 태양신을 섬기로 종용하였다. 생산력을 증대 시키기 위해, 그리고 관개와 계단식 농업의 속도를 올리기 위해서 함락국의 노동력을 이용하였으며, 농토를 비옥하게 하기 위해 페루 서해안의 섬에 있는 해조의 똥이 퇴적 경화하여 생긴 천연비료를 사용하기도 했다. 잉카 정부는 모든 사람들에게 태양신을 섬길 것을 강요하는 권위적이고 엄격한 정부였다.

 

그들은 신전과 요새, 그리고 북 키토(에콰도르)에서 중앙 칠레 딸까까지 이어지는 3,250 마일이나 되는 도로를 만들었다. 이 도로는 제국의 힘을 유지하는 데 요긴하게 쓰이기도 했지만, 후에 아이러니컬하게도 스페인 정복자들이 잉카 제국을 쉽게 정복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잉카 제국의 통치자와 그의 수행원들을 위해서 매 4.5마일 마다 도로를 수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12마일 마다 휴게소 혹은 땀보라 불리는 객사가 있었다. 또한, 잉카 제국의 전령 챠스퀴스가 쉴 수 있도록 매 5마일 마다 작은 우체국이 있었다. 한 명의 챠스퀴스는 하루에 약 150마일을 달린 후에 교체된다. 구두전언은 결승 문자나 매듭문자로 보충되었다. 이는 고대 유럽에서 사용되던 탤리스틱과 비슷하다.

 

잉카 제국의 모든 사람은 살기 위해서 일을 하여야만 했고, 심지어 귀족들도 솔선수범 일을 하였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이것을 잉카 제국이 두 계층의 조직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뒷받침하는 근거, 파까떼라고 주장한다. 일반 사람들이 법을 어겼을 때 받는 형벌은 관리들의 그것보다 덜 엄격했다. 이것은 잉카 제국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상위 계층의 중요성을 강조한 한 예이다.

 

 

꾸스꼬 왕조

꾸스꼬 왕조의 첫 번째 왕족은 망꼬 카팍이다. 잉카 사람들은 약 12세기 경, 꾸스꼬에 작은 도시를 세우며 잉카 문명의 싹을 피웠다. 1438년 경 사파 잉카(유일한 왕) 파차꾸띠-꾸시 유빵끼는 꾸스꼬 주변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파차꾸떽이란 명칭은 그가 현재의 아푸리맥인 찬까스를 정복한 후에 붙여졌다. 그와 그의 아들 뚜팍 유빵끼는 안데스 산맥(대략 현재의 페루와 에콰도르)의 상당 부분을 잉카 제국의 통치하에 복속 시켰다.

 

 

 황제 호칭 및 관련

잉카제국의 군주는 사파 잉카(Sapa Inca, 케추아어로 '유일한 왕'이라는 뜻)라는 칭호로 불렸다. 이는 보통 '황제'로 번역된다. 5대까지는 제1왕조, 6대부터가 제2왕조이다. 제국으로써 성립된 시기는 9(2왕조 4) 파차 쿠티크의 때이다. 13(2왕조 8) 아타 왈파의 대에서 제국은 멸망하나 이후 잔존 세력이 남아 스페인에 저항을 계속했다. (14대부터)

 

 

 

 

 

 

잉카제국의 멸망과 엘니뇨

스페인, 전염병 덕분에 페루 남부까지 쉽게 공략

 

 

아메리카 대륙 침략전쟁의 1등 공신은 천연두

남아메리카에 세워진 위대한 문명이 잉카문명이다. 1200년대 중반 잉카족은 페루의 티티카카 호수 인근의 고지대에 정착했다. 이들은 1400년대부터 이웃 나라들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전쟁 결과 북쪽으로 키토에서 남쪽으로 산타아고까지 무려 2500마일에 달하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정복한 부족들을 자신들의 문화로 흡수하고 그들에게 공통어 케추아어를 사용하도록 해 일체성을 이뤄 나갔다. 잉카제국은 무려 1600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통치할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 침략전쟁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천연두 덕분이었다.”

 

역사가들은 북미의 인디언, 멕시코의 아스테카 문명, 남미의 잉카 문명들이 그토록 쉽게 백인들에 의해 정복된 것은 백인들과 함께 들어온 전염병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의도적이지는 않았을지라도 백인들이 퍼뜨린 천연두나 홍역·인플루엔자 등의 전염병은 깨끗한 환경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몰살시키는 죄악을 불러온 것이다.

 

200년 이상 견고한 제국을 이어 오던 잉카제국도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1525년 황제가 사망하면서 두 명의 이복형제가 후계자 자리를 두고 치열한 내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내우외환이 겹친 중에 1531년 스페인의 피사로가 공격해 왔다.

그것은 500배나 더 많은 적과 싸워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크게 이긴 기묘한 전투였다.”

 

스페인의 피사로 장군은 잉카제국과의 전투를 이렇게 회상했다. 잉카의 새 황제는 1532년 페루의 카하마르카에서 스페인의 피사로 장군과 만났다. 비록 수많은 인디언이 전염병으로 죽었지만 잉카군은 8만 명인데 반해 피사로의 군대는 168명에 지나지 않았다. 병력이 너무 적어 무시했기 때문이었을까? 잉카황제는 무장하지 않은 2천명의 수행원만 데리고 피사로와 만났다. 피사로는 신부(神父)를 보내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고 스페인의 국왕을 섬길 것을 요구했다. 잉카황제가 거부하자 숨어 있던 스페인군이 일제히 뛰어나와 비무장한 인디언들을 기습 공격했다. 황제가 사로잡히자 후위의 무장한 인디언도 더 이상 저항하지 못했다. 스페인군은 짧은 시간에 단 한 명의 병력 손실도 없이 7천명을 살육했다. 그리고 이후 피사로는 정복전쟁을 통해 잉카제국을 멸망시키고 만다.

 

 

피사로가 정복전쟁에서 승리한 원인

 

피사로가 정복전쟁에서 승리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스페인의 앞선 신무기와 기마병을 이용한 전술이 주효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후학자들은 날씨가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주장한다.

 

페루의 지형은 태평양에 접해 있는 해안과 구릉, 안데스 산맥, 그리고 그 너머에 아마존 강의 상류인 평야지대로 이뤄져 있다. 해안과 구릉지역은 연 강수량이 20내외로 비가 거의 오지 않는다. 안데스 산맥은 추위와 함께 강풍이 몰아치는 곳이다.

그런데 기후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당시에 엘니뇨 현상이 발생했다고 한다. 해안과 구릉지역에 비가 많이 내려 물과 식량 사정이 매우 좋았다는 것이다.

 

안데스 산맥 또한 그리 춥지 않았다. 이런 기상조건 때문에 스페인군이 페루의 북부로부터 남부 산악지역인 마추피추까지 쉽게 공략할 수 있었다. 더구나 이런 기후조건은 천연두 등의 전염병이 번지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기에, 인디언들을 무력화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의 고고학자인 미카엘은 엘니뇨에 수반된 비가 12세기 때에도 치무라는 페루 왕조를 붕괴시켰다고 주장한다. 1100년께 홍수에 의해 파괴된 것으로 보이는 관개 설비의 유적을 연구해 보니 엘니뇨에 의해 초래된 비가 수로를 파괴하고 농장을 망쳐 큰 기근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의 추론은 왕이 신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에 왕국이 30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퍼붓는 비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이 지방의 전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엘니뇨가 남미 지역의 큰 왕국 두 개를 멸망시키는 데 일조한 것이다.

 

잉카의 황제는 몸값으로 시가 20조 원에 해당하는 황금을 피사로에게 주었으나 결국 처형되고, 찬란한 문명의 잉카제국은 안데스 산맥 위에 유적지만 남긴 채 역사 속에 묻혀버리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