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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5월1일~5일(4박5일)낙양,용문석굴,소림사 - 09

정상고집 2014. 5. 8. 15:39

2014년5월1일~5일(4박5일)

날씨 : 맑음

장소 : 화산,태백산,용문석굴,소림사

 

제4일(4일) : 서안-낙양이동 ( 고속열차 이용 )

       낙양 도착 후 중국3대 석굴중 하나인 용문석굴 탐방

       ** 3대석굴 : 막고굴 / 운강석굴 / 용문석굴

       ** 용문석굴 & 향산사 & 백거이묘 탐방

       중식 후 숭산으로 이동

       소림사 전통무예공원 관람 / 소림사 탐방 / 탑림등 탐방

       낙양-서안 고속열차 이동 ( 열차 지연으로 63분 지연 출발 )

 

원래 뤄양(洛陽)이라는 이름은 도시가 뤄허(洛水)의 북쪽에 위치한 데에서 유래되었다. 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해는 강의 남쪽 부분에서 뜨기 때문에 햇빛은 항상 강의 북쪽 부분이 받게 된다.(이것은 중국의 오래된 작명 방식이다) 낙양은 몇 세기 동안 낙읍(洛邑), 낙주(洛州)와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또한 당나라 때는 동쪽의 수도라는 의미로 동도(東都)라 불렸고 송나라 때는 서쪽의 수도라는 의미로 서경(西京) 혹은 경락(京洛)으로 불리었다.

주나라 시절에는 뤄허와 마찬가지로 雒陽, 洛陽 등의 표기가 공존했고, 진나라는 수덕(물의 덕)을 표방했으므로 洛陽을 공식화했다. 한나라는 화덕(불의 덕)을 숭상했으므로 洛의 삼수변을 꺼려 雒陽을 사용했으나, 위나라는 토덕(흙의 덕)을 내세웠으므로 다시 洛陽으로 돌아갔다.

'위경(魏京)'은 지금도 다른 뤄양의 비공식적 이름으로 사용된다. 이는 뤄양이 삼국시대 위나라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또, 뤄양의 북쪽에 있는 북망산(北邙山)은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 북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의 왕후나 공경[公卿]들이 대부분 이곳에 묻혔다. 북망산(北邙山)의 본래 이름은 망산(邙山)이다.망산이 낙양의 북쪽에 위치하기에 북망산이라 불리는 것이다. 본래 북망산은 풍광이 수려한 명산이었다.그러나 그 수려한 풍광이 명당자리를 찾는 고관대작들이 하나둘씩 북망산에 묏자리를 만들었고 북망산을 공동묘지로 만들었다.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때에 이 곳으로 도읍을 잡아 생활했다는 말이 갑골문에 전해진다. 그리고 한(漢) 고조 유방(劉邦)이 세운 한나라 시기에 대도시로 발전하고, 황하 강을 통해 물자가 많이 들어와 경제적으로 발달한 도시로 거듭난다. 그 이후 한(漢) 세조 유수(劉秀)가 다시 외척 왕망(王莽)을 무찌르고 낙양에 수도를 두어 도시 발전에 힘을 쓴다. 그 결과 낙양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상당히 발전한 도시가 된다.

그러나 한나라는 후반부에 황건적의 난을 거치면서 쇠퇴해지며, 동탁이 집권하자 조조, 손견, 원소 등이 궐기하여 동탁에 맞서 싸웠으며 손견화웅을 무찌르자 동탁은 손견을 두려워해서 이각을 사신으로 보내 화친을 청하지만 손견에 의해 간단히 거절당했다. 이로 인하여 후한의 수도인 낙양은 결국 승상인 동탁(董卓)이 불을 질러 폐허 도시로 만든다. 동탁이 폐허로 만들었지만 손견이 화재를 진압하고 임시로 도시 구실만 할 수 있는 정도로 부분재건을 해 놓는다. 이 사건 이후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뤄양 시민들은 동탁에 대해서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동(董)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핍박하고 혐오한다. 동탁은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며 황제 행세를 하다가, 같은 편인 왕윤(王允)과 여포(呂布)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또다시 군벌들이 싸움을 일으킨다. 그러자 낙양은 수도로써 제 기능을 구실할 수 없었는데, 그 중 강력했던 군벌인 조조(曹操)가 황제에게 건의하여 낙양을 완벽하게 재건하는 한편, 수도를 임시로 허난 성에 있는 (許)로 옮겼다. 위나라가 세워지고 조조가 죽고 조조의 아들인 위 문제 조비(曹丕)가 낙양을 다시 정비하여 위나라와 낙양의 권위를 상당히 높였다. 그러자 낙양은 새로이 황궁이 들어서고 많은 주민들이 이 곳으로 이사를 오자, 삼국시대 중 가장 화려하고 번창한 도시였다. 위를 이은 서진 역시 수도를 인구 많고 살기 좋은 낙양에 두었다. 이에 따라 뤄양 시민들은 동(董)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혐오하는 반면 조(曹)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우대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화려한 번영을 누리던 도중, 4세기에 들어 북방의 유목민족이 화북에 침입해오기 시작했다. 허난 성은 후조(319~351), 전연(334~370), 전진(351~394), 후연(384~407), 후진(384~417) 등이 점령했었다. 439년 북위(386~534)가 북중국을 통일했고, 493년에는 수도를 낙양으로 옮겼다.

북위는 534년에 분열되었고, 589년에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였다. 수 양제 양광(楊廣)은 백성들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무리를 하면서까지 아버지인 수 문제 양견(楊堅)이 수도를 장안(長安)에 두었던 것을 낙양으로 옮기려 하였는데, 이는 수나라가 망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양광은 황위에 오르고 백성들로 하여금 강제로 토목 공사를 시켜 낙양에 큰 대수궁을 짓고 큰 운하를 만들었다.

당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낙양은 장안 다음으로 큰 도시가 된다. 이제 비록 낙양은 정치적인 도시로써의 기능은 쇠퇴했으나, 황하 강을 통한 경제적인 도시로써의 기능은 변함이 없었다. 경제적으로 아주 발전한 도시였기에, 장강(長江)에 있는 대도시 남경(南京)과 더불어 당나라 이후의 시기부터 현대 시기까지 낙양은 중국 왕조 시절 중에도 갑부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도시로 거듭났다.

지금의 뤄양은 밤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세계 대도시이다. 비록 낮에는 세계에 있는 다른 대도시와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유난히도 뤄양의 밤의 경치는 세계 대도시 중 1등이다. 특히 도심 주변과 부도심 중앙부 주변은 네온사인이 화려한 동네들이 많다. 특히나 전기 사용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대도시로써, 뤄양 시장은 최근에 에너지 절약을 위해서 조금씩이나마 전력 사용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고, 시민들에게도 전력 사용을 최소화하자며 독려하고 있다.

 

  

 

 

 

뤄양 시 현급 행정구역도

 

 

 

 

 

 

 

 

 

 

 

 

 

 

 

 

 

 

 

 

 

 

 

 

 

 

 

 

 

 

 

 

 

 

 

 

 

 

 

 

 

소림사(중국어: 少林寺)는 중국 허난 성(河南省) 의 정저우(鄭州) 숭산(嵩山)에 있는 사찰이다.[1]

496년 선종의 시조인 달마대사가 소림사를 창건했다고 알려져있다. 북주(北周)시대에 파괴되었으나, 수나라시대에 수 문제에 의해 재건되었다.

소림사는 무술로 매우 유명하다. 소림무술의 시초는 달마대사가 면벽수련을 하는 승려들의 건강을 위해 5가지 동물의 움직임을 본따서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현재는 중국무술의 대명사로 통한다.

2010년 8월 2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