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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5월1일~5일(4박5일)낙양,용문석굴 - 08

정상고집 2014. 5. 8. 15:34

 

2014년5월1일~5일(4박5일)

날씨 : 맑음

장소 : 화산,태백산,용문석굴,소림사

 

제4일(4일) : 서안-낙양이동 ( 고속열차 이용 )

       낙양 도착 후 중국3대 석굴중 하나인 용문석굴 탐방

       ** 3대석굴 : 막고굴 / 운강석굴 / 용문석굴

       ** 용문석굴 & 향산사 & 백거이묘 탐방

       중식 후 숭산으로 이동

       소림사 전통무예공원 관람 / 소림사 탐방 / 탑림등 탐방

       낙양-서안 고속열차 이동 ( 열차 지연으로 63분 지연 출발 )

 

원래 뤄양(洛陽)이라는 이름은 도시가 뤄허(洛水)의 북쪽에 위치한 데에서 유래되었다. 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해는 강의 남쪽 부분에서 뜨기 때문에 햇빛은 항상 강의 북쪽 부분이 받게 된다.(이것은 중국의 오래된 작명 방식이다) 낙양은 몇 세기 동안 낙읍(洛邑), 낙주(洛州)와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또한 당나라 때는 동쪽의 수도라는 의미로 동도(東都)라 불렸고 송나라 때는 서쪽의 수도라는 의미로 서경(西京) 혹은 경락(京洛)으로 불리었다.

주나라 시절에는 뤄허와 마찬가지로 雒陽, 洛陽 등의 표기가 공존했고, 진나라는 수덕(물의 덕)을 표방했으므로 洛陽을 공식화했다. 한나라는 화덕(불의 덕)을 숭상했으므로 洛의 삼수변을 꺼려 雒陽을 사용했으나, 위나라는 토덕(흙의 덕)을 내세웠으므로 다시 洛陽으로 돌아갔다.

'위경(魏京)'은 지금도 다른 뤄양의 비공식적 이름으로 사용된다. 이는 뤄양이 삼국시대 위나라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또, 뤄양의 북쪽에 있는 북망산(北邙山)은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 북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의 왕후나 공경[公卿]들이 대부분 이곳에 묻혔다. 북망산(北邙山)의 본래 이름은 망산(邙山)이다.망산이 낙양의 북쪽에 위치하기에 북망산이라 불리는 것이다. 본래 북망산은 풍광이 수려한 명산이었다.그러나 그 수려한 풍광이 명당자리를 찾는 고관대작들이 하나둘씩 북망산에 묏자리를 만들었고 북망산을 공동묘지로 만들었다.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때에 이 곳으로 도읍을 잡아 생활했다는 말이 갑골문에 전해진다. 그리고 한(漢) 고조 유방(劉邦)이 세운 한나라 시기에 대도시로 발전하고, 황하 강을 통해 물자가 많이 들어와 경제적으로 발달한 도시로 거듭난다. 그 이후 한(漢) 세조 유수(劉秀)가 다시 외척 왕망(王莽)을 무찌르고 낙양에 수도를 두어 도시 발전에 힘을 쓴다. 그 결과 낙양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상당히 발전한 도시가 된다.

그러나 한나라는 후반부에 황건적의 난을 거치면서 쇠퇴해지며, 동탁이 집권하자 조조, 손견, 원소 등이 궐기하여 동탁에 맞서 싸웠으며 손견화웅을 무찌르자 동탁은 손견을 두려워해서 이각을 사신으로 보내 화친을 청하지만 손견에 의해 간단히 거절당했다. 이로 인하여 후한의 수도인 낙양은 결국 승상인 동탁(董卓)이 불을 질러 폐허 도시로 만든다. 동탁이 폐허로 만들었지만 손견이 화재를 진압하고 임시로 도시 구실만 할 수 있는 정도로 부분재건을 해 놓는다. 이 사건 이후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뤄양 시민들은 동탁에 대해서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동(董)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핍박하고 혐오한다. 동탁은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며 황제 행세를 하다가, 같은 편인 왕윤(王允)과 여포(呂布)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또다시 군벌들이 싸움을 일으킨다. 그러자 낙양은 수도로써 제 기능을 구실할 수 없었는데, 그 중 강력했던 군벌인 조조(曹操)가 황제에게 건의하여 낙양을 완벽하게 재건하는 한편, 수도를 임시로 허난 성에 있는 (許)로 옮겼다. 위나라가 세워지고 조조가 죽고 조조의 아들인 위 문제 조비(曹丕)가 낙양을 다시 정비하여 위나라와 낙양의 권위를 상당히 높였다. 그러자 낙양은 새로이 황궁이 들어서고 많은 주민들이 이 곳으로 이사를 오자, 삼국시대 중 가장 화려하고 번창한 도시였다. 위를 이은 서진 역시 수도를 인구 많고 살기 좋은 낙양에 두었다. 이에 따라 뤄양 시민들은 동(董)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혐오하는 반면 조(曹)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우대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화려한 번영을 누리던 도중, 4세기에 들어 북방의 유목민족이 화북에 침입해오기 시작했다. 허난 성은 후조(319~351), 전연(334~370), 전진(351~394), 후연(384~407), 후진(384~417) 등이 점령했었다. 439년 북위(386~534)가 북중국을 통일했고, 493년에는 수도를 낙양으로 옮겼다.

북위는 534년에 분열되었고, 589년에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였다. 수 양제 양광(楊廣)은 백성들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무리를 하면서까지 아버지인 수 문제 양견(楊堅)이 수도를 장안(長安)에 두었던 것을 낙양으로 옮기려 하였는데, 이는 수나라가 망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양광은 황위에 오르고 백성들로 하여금 강제로 토목 공사를 시켜 낙양에 큰 대수궁을 짓고 큰 운하를 만들었다.

당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낙양은 장안 다음으로 큰 도시가 된다. 이제 비록 낙양은 정치적인 도시로써의 기능은 쇠퇴했으나, 황하 강을 통한 경제적인 도시로써의 기능은 변함이 없었다. 경제적으로 아주 발전한 도시였기에, 장강(長江)에 있는 대도시 남경(南京)과 더불어 당나라 이후의 시기부터 현대 시기까지 낙양은 중국 왕조 시절 중에도 갑부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도시로 거듭났다.

지금의 뤄양은 밤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세계 대도시이다. 비록 낮에는 세계에 있는 다른 대도시와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유난히도 뤄양의 밤의 경치는 세계 대도시 중 1등이다. 특히 도심 주변과 부도심 중앙부 주변은 네온사인이 화려한 동네들이 많다. 특히나 전기 사용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대도시로써, 뤄양 시장은 최근에 에너지 절약을 위해서 조금씩이나마 전력 사용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고, 시민들에게도 전력 사용을 최소화하자며 독려하고 있다.

 

  

 

 

 

뤄양 시 현급 행정구역도

 

 

룽먼석굴(중국어 간체: 龙门石窟, 정체: 龍門石窟, 병음: Lóngmén shíkū)은 중국 허난 성 뤄양 시의 남쪽 13km 아래의 양쪽 언덕에 있는 동굴 사원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룽먼석굴의 역사는 북위의 효문제가 산서성다퉁에서 뤄양으로 천도한 494년(태화 18년)부터 시작된다. 불교 조각 역사상 윈강석굴의 뒤를 이은 룽먼기(494년 - 520년)로 불리는 시기의 시작이다.

윈강석굴의 엉성한 사암질과 비교하면, 룽먼석굴의 특징은 딱딱하고, 촘촘한 감람석 재료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북위기에 있어서는, 운강과 같이 거대한 석굴을 깎는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위서 석로지에도, 500년(경명 2년)에 선무제가 효문제를 위해서 축조한 석굴은 규모가 너무 커서 햇빛이 보이지 않고, 계획축소를 피할 수 없게 된 내역을 기록하고 있다. 양식상의 특징은 갸름하고 처진 어깨, 목이 긴 조형이며, 전체적으로 가녀린 인상을 주는 점에 있다. 또 중국 고유의 조형도 눈에 띄어, 서방풍의 흔적은 희박해진다. 상괘좌가 발달하고, 장식도 섬세하여 회화적인 표현이 두드러졌다.

최초의 제작기는 5세기말 〈고양동〉 석굴 내부에서 볼 수 있는 사적인 불상 축조에 시작되었다. 전대인 선무제의 계획을 수용하여 산과 들을 깎아 만든 〈빈양동〉 3굴 가운데, 실제로 북위에 완성한 것은 〈빈양중동〉뿐이었고, 〈빈양남동〉과 〈북동〉이 완성된 것은 당나라 초기였다. 그 외 북위 시기의 대표적인 석굴로는 〈연화동〉을 들 수 있다. 북위 멸망 후에도 석굴의 축조는 대를 이어 계속되는데 〈약방동〉은 북제로부터 수나라에 걸쳐 축조된 석굴이다.

〈당나라〉 때는 위나라의 왕 태가 빈양 3동을 수복해, 저수량(褚遂良)에게 명을 내려 서도사상 유명한 「이궐불감비」를 쓰게 하여 641년(정관 15년)에 비를 세웠다. 당나라 시대의 첫 대표작으로는 656년 - 669년(현경 연간~총장 연간)에 완성한 〈경선사동〉이 있다. 그 후 〈혜간동〉이나 〈만불동〉이 완성되어, 고종 시대에 룽먼석굴은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 절정기의 석굴이 675년(상원 2년)에 완성된 〈봉선사동〉이다. 이것은 룽먼 최대의 석굴로 고종 때 시작되어 황후 무씨(후의 측천무후)도 예산을 기부하였다. 그 본존 비로자나불의 얼굴은 당시 이미 실권을 장악 하고 있던 측천무후의 용모를 조각한 것이라는 전설이 있지만, 기부된 시기와 맞지도 않고 여러 근거에서 부정되고 있다. 측천무후는 미륵불의 화신이라고 하여 존상도 맞지 않다.

측천무후의 시대에는 서산의 남방, 〈정토동〉의 부근까지 축조가 되었으므로, 측천무후 말에서 현종에 걸친 시기에는 동산에도 산과 들을 깎아 석굴을 축조하게 되게 되었다. 〈간경사동(看経寺洞)〉이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또한 조각된 불상의 곁에는 조각상의 동기나 공양문, 각자의 이름이나 조각된 년월 등이 조상기로서 조각되어 덧붙여져 있지만, 북위 대부터 조각되어 특별히 뛰어난 20점에는 《룽먼 20품》이라고 하여 육조 진서의 서적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