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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블랑 등정사

정상고집 2012. 6. 20. 23:58

몽블랑 등정사

산을 왜 오르는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산이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산을 오른다. 어떤 이유에서든 어떤 목적으로든 산을 오른다. 현재 우리는 모든 자연현상들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고도로 발달된 문명 세상에서 삶을 살고 잇다. 급속도로 발달한 첨단의 통신과 수송 수단 온갖 과학장비 덕분에 지구상에는 이제 더이상 미지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18세기, 풀 한포기없이 일년 내내 얼음과 눈으로만 덮여 잇는 몽블랑 사람들은 흰산 몽블랑을 저주받은 산이라고 불렀다. 당시 어떤 과학적 자료도 기록도 없었던 미지의 세계 저주받은산 몽블랑 그곳을 오르려던 옛선구자들의 발자취를 찾아 보자. 

1741년, 제네바에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돌아온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특히 긴여행을 통해 동방 국가를 다녀온 탐험가들 주변은 새로운 세상 이야기를 들으려는 사람들로 북적 대었다. 이집트와 터키등 아랍국가를 다녀온 웅변술이 뛰어난 영국인 모험가 윌리엄 윈드햄주변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경이로운 여행담을 듣고 있었다.

수많은 모험가들이 모인 그날 사람들은 지구 어느곳이라도 못갈곳이 없을 정도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제네바가 고향인 성격이 과묵하고 신중한 스위스의 모험가 리차드 포코크 그는 자연스럽게 알려지지 않은 세계 알프스의 빙하지대를 예기 하였다.

극도로 위험하고 매우 추우며 수시로 무너지는 얼음 탑과 눈사태 무시무시한 괴물과 용이 살고있는 저주받은 산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오르지 않은 얼음과 눈만 쌓여있는 저높은 곳그날 용기와 기백이 일치했던 두모험가 윌리암과 리차드는 당장 그곳을 오르기로 합의하고 제네바에서 아메리카 대륙보다 더멀게 여기던 폐쇄적인 계곡 샤모니로 떠나기를 결정한다. 여러 마리의 당나귀에 충분한 식량을 나눠실고 여덟 명의 인부와 다섯 명의 중무장 군인을 대동한체 삼일간의 캐러반을 시작하였다.


무장한 군인들을 대동한 것은 샤모니계곡에 포악한 야만인들이 살고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샤모니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을 맞이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농사를 짓고 살던 친절한 카토릭 수도자들이었다. 의심스런 군인들로 원정대가 샤모니사람들과 어색해하는 사이 수다스런 영국모험가 윌리엄은 벌써 수도원장과 친해져있었고 그들의 방문 목적을 전해들은 수도원장은 젊은 두사람의 모험을 만류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많은 위험스런 여행을 통해 얻은 경험으로 축적된 두모험가의 행동은 이미 빙하가 녹아 흐르는 아르브천을 건너 몽탕베르를 오르고 있었다. 오르면서 힘들 때마다 먹을 것을 꺼내먹고 쉬어가면서 차근 차근 끝없는 원시림과 비탈길을 올랐다. 

(1908년 등산열차가 개통 되지전까지 이 길은 노새 길로 불리며 최초의 샤모니 등산로로 개척된다.) 이윽고 그들이 몽탕베르에 도착하여 보게된 얼음과 구덩이로 만들어진 빙하의 경이로움은 불어나 영어 어떤 단어로도 표현 할 수 없는 충격과 놀라움의 극치였다. 


 
충격적인 빙하실체의 모습을 접한 그들의 입에서는 자연스레 빙하의 바다라는 말이 흘러 나왔고 멀리 그랑조라스에서부터 펼쳐지는 대자연의 경탄스런 파노라마로 두모험가의 흥분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제네바를 처음 출발할 때 두모험가는 몽블랑 등정을 생각햇었다. 하지만 1910m의 몽탕베르에서 빙하를 보고 놀란 그들에게 아직까지 몽블랑은 저주받은 산으로 그들이 접근하기에는 일럿다. 

1741년, 두모험가 윌리엄과 리차드의 몽탕베르원정은 제네바를 꽤나 시끄럽게 하였다. 제네바로 돌아온 후 윌리엄의 수다스런 모험담은 사람들로부터 얼음 세계의 새로운 궁금증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언론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대서특필 하였다. 이후 샤모니에는 갑작스런 변화가 생기게되고 샤모니사람들에게는 이상스럽게만 보이는 빙하를 구경하려는 돈 많은 사람들이 하나둘 샤모니를 찾게된다. 

1760년, 갓20세를 넘긴 부유한 귀족집안의 청년 소쉬르(Horace Benedict de Saussure) 그는 여행이 아닌 새로운 계획 언젠가는 몽블랑을 오르려는 생각을 가지고 몸종 시몽과 함께 샤모니로 출발한다.

어떤 사람도 접근할 수 없는 저주받은 산이라고 강조하는 시몽의 조언을 뿌리친 채 좀더 자세히 몽블랑을 관찰하기 위해 그는 브레방을 오르기로 결심한다. 20년전 윌리엄과 리차드의 몽탕베르 등정기록을 꼼꼼히 검토한 후 그는 자신감을 가지고 브레방을 올랐다. 

브레방을 오르는데 가장큰 어려움은 등반 자체가 아니라 새로운 모험가들의 원정을 반대하는 샤모니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샤모니성당에 고액의 헌금을 약속한 후 그들로 부터 등반의 허락과 도움을 얻었다. 


브레방에서 몽블랑을 관찰한 후 소쉬르는 몽블랑 등정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되고 과학적인 가능성의 연구와 준비를 시작한다. 자연과학자였던 그는 당시로서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햇던것 까지도 연구대상으로 검토를 시작한다. 과연 얼마나 많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야 몽블랑을 오를 수 있을까? 그는 대기압을 측정하는 실험부터 시작을 한다. 대기압의 차이로 고도가 실제 등정의 높이와 같을 것인가? 기압의 차이에 따른 물이 끓는 온도는 몇도가 되야 할것인가? 그 외 온도와 기압의 관계 빙하의 방향과 산맥의 관찰 습도에 따른 대기투명도의 차이 등등... 성격이 꼼꼼하였던 소쉬르는 수도 없이 샤모니를 들락거리며 과학적 실험을 토대로 얻어진 결과를 가지고 처음으로 몽블랑 지도와 산세를 스케치한다. 이 모든 과학적 자료들은 몽블랑 등정이 목표였다. 

그의 몽블랑을 오르기위한 연구와 실험은 늘 새로운 문제와 어려움에 부딛히며 20년의 새월이 흐른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실험을 통해서 얻은 자료를 가지고도 그는 확실한 등정의 가능성의 해결책을 찾지못한다.

그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과연 어디서 출발하여 어느루트로 올라야 몽블랑의 정상에 다닿을수있는 길이 연결 되는지를 풀지 못햇다. 여러해를 통해 수없이 많은 등반을 여러곳에서 가이드들과 시도하였지만 해가지는 밤이 되면 더이상 진행을 하지못하고 되돌아내려오곤 하였다. 결국 처음 샤모니를 찾은지 25년의 세월이 흐른후 소쉬르는 몽블랑등정의 꿈을 포기하게된다.(그이유에는 그의딸과 샤모니사람들과의 심각한 논쟁의 싸움이 동기가 되었다.) 



1786년 6월 7일, 몽블랑을 등정하기 위한 두개조의 등반대가 산을 오른다. 이번등반의 동기는 몽블랑등정의 꿈을 포기한 소쉬르가 많은 상금을 내건이후 처음으로 시도 되는 등반이었다. 

한팀은 샤모니에서 등반을 시작하였고 한팀은 셍 제르베에서 출발을 하였다. 

에귀 뒤 구테(Aiguille du Gouter) 정상에서 합류 하기로 하고 출발한 두팀은 샤모니에서 출발한 등반대가 먼저 에귀 디 구테에 도착하였다. 

다섯명의 가이드로 구성된 샤모니팀은 지체하지않고 곧바로 정상을 향하여 발길을 옮기고 그뒤를 따르던 셍제르베를 출발한 등반대의 한명중 뛰어난 체력을 소유한 쟉 발마(Jacpues Balmat)는 샤모니팀을 앞질러 버린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수정과 사냥을위하여 산을 오를때와 마찬가지로 정상에 금이 묻혀있는 것과 같은 상금을 타기위한 욕심뿐이었다. 제일먼저 정상을 오르는 사람에게 가장많은 상금이 걸린 이등반에 모든 등반가들은 서로 먼저 오르려는 경쟁심에 불타고있었다. 

170의 키에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가진 단단한 체력의 쟉 발마 그는 샤모니에서 평판이 좋질않았다. 그이유로는 마을 사람들이 수정을 캐기위해서나 사냥을 위하여 그와 함께 산을 오를때면 늘 좋았던 날씨가 나빠져버리는 이상스런 음산한 기운을 소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뒤를 따라오르던 다른사람들은 앞서가는 발마를 향해 소리쳤다. 


"재수없는 발마야 마을로 돌아내려가라!"
"당신이 앞서가는 등반을 우리는 거부한다 집으로 돌아가라!" 

고집불통이었던 쟉 발마는 온갖 욕설에도 변함없이 걷던길을 꾸준히 올라갓다. 결국 얼마후 머리위의 능선으로 구름이 끼기 시작하더니 눈가루를 동반한 바람이 한치의 앞도 분갈할수없게 변하고 말았다. 샤모니로 돌아 갈수있는 지나온 흔적마저도 사라지고 있었다. 쟉 발마를 원망하며 뒤따르던 사람들은 혼자 올라가서 상금을 타가지고 잘살라는 말을 그의 등뒤에 남기고 샤모니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녹초가되어 샤모니로 되돌아 내려오는 동안 몽블랑은 천둥번개를 동반한 먹구름속으로 사라져버렷다. 혼자서 정상까지 등반을 한다는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혼자 오르던 쟉 발마 그역시 언젠가 다른사람과 다시 오르겠다는 생각을 갖고 하산을 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샤모니에 도착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눈과 얼음으로 덮인 산위에서의 비박은 곧 죽음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쟉 발마는 지난밤의 경험으로 예외적인 생각을 갖고있었다.

그 이후 얼마가 지난 여름 어느날 발마의 어린딸이 중병에 걸리게 된다. 다급한 그는 샤모니에 한명 뿐인 의사를 집으로 부르게되고 검진을 마친의사는 조용히 발마에게 의외적인 질문을 하게된다. 

당신이 지난번 샤모니가이들과함께 몽블랑 등정을 시도하신분이신가요?  그들과 관계가 석연찮은 쟉 발마는 그렇다고 침울하게 대답한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지만 저는 당신이 거의 정상 가까운 곧까지 다달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빙하에서 밤을 새우셨나요? 
쟉 발마는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은 빙하에서의 비박 경험을 의사에게 얘기한다. 
왜 그런것들을 이자리에서 저에게 묻습니까? 
한동안 긴침묵이 무겁게 방안에 감돈후 의사가 질문을 던졌다. 쟉 발마씨 저를 몽블랑의 정상까지 안내 하실수 있으십니까? 
쟉 발마는 어떤 대답도 하지않았다. 
가난한 수정 채취자 쟉 발마의 눈빚을 바라본 의사는 다시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등정후 모든 상금은 당신혼자 다 가지십시오. 그리고 더불어 저를 안내한 가이드비를 추가로 지불 하겠습니다. 



1757년, 샤모니에서 태어난 푸른눈을 가진 닥터 미셸 갸브리엘 파캬드(Michel Gabriel Paccard) 순수한 열정으로 남몰래 몽블랑을 오르려는 꿈을 키워온 젊은 의사 그는 그렇게하여 몇일 후 쟉 발마와 단둘이 몽블랑 등정을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샤모니를 출발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빙하에서 비박은 살아남지 못할것이라는 염려에도 불구하고 보름달 아래 그들은 Cote산 정상에서 비박을 한후 새벽 네시 다시 출발을 하여 아무도 발길이 닿지 않은 몽블랑의 정상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오르기 시작했다. 고도가 높아 지면서 한발을 내디딜 때마다 수도없이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고 기압측정을 위해

가지고 올라온 측정기는 엄청나게 보행을 불편스럽게 하였다. 

한낮이 되면서 태양빚에 의사 미셸 갸브리엘은 거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멀어졌고 정상이 가까와 지면서 불기시작한 거센바람은 더욱 진행을 어렵게하였다. 

드디어 1786년 8월8일 오후6시 23분 두사람의손과발이 추위로 감각을 잃어버릴무렵 힘겹게 그들은 마침내 정상에 올랐다. 정상을 오른후 오로지 상금에만 관심을 두었던 쟉 발마는 정상에서 조금이라도 지체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는 미셸에게 여러이유를 핑계로 하산을 종용하고 어렵게 올라온 미셸 갸브리엘은 몇가지의 기압측정과 등반의기록을 정리한후 정상에서30분을 머물다 하산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자정무렵 미셸 갸브리엘은 거의 봉사가 되어 쟉 발마의 손에의해 샤모니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극도로 지쳐있었다. 

마크 테오도르 부리트(Marc Theodore Bourrit) 일반인들에게 몽블랑과 빙하가 널리 알려지게 되는 결정적 역할을한 인물 제네바 대성당에서 사무일을 보는 성가대원으로 남다른 글솜씨와 그림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마크 테오도르는 20년간 소쉬르와함께 샤모니를 들락거리며 소쉬르가 연구한 과학적 자료들을 바탕으로 2450점의 몽블랑스케치와 지도 그리고 수많은 글들을 책으로 써서 몽블랑을 세상에 알렸다. 

몽블랑 에서 거의 주검이되어 돌아내려온 두사람을 맞이한 마크 테오도르는 두사람의 등정을 인정할수없다고 마을사람에게 주장하며 쟉 발마와 격론을 벌인다. 극도로 피로에지친 쟉 발마는 제네바로 돌아가서 등정은 허구라는 기사를 쓰겠다는 마크 테오도르의 고함을 들으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처구니없는 막 테오도르의 발언에 흥분을 감추지못한채 집으로 돌아온 그는 싸늘하게 식어있는 딸의 주검을 발견한다. 인정받지못한 그의 등정과 딸의 죽음 쟉 발마는 큰 슬픔에 빠져들었다.

이튿날 미셸 갸브리엘이 작성한 정상에서의 기록들과 샤모니에서 함께 등반을 관찰한 여러사람들에의해 막 테오도르의 주장은 악의에찬 모함으로 간주되어 두사람의 등정은 성공으로 인정받는다. 미셸 갸브리엘과 쟉 발마 그둘은 이제 앞으로 소쉬르보다 더 유명한 이름으로 알프스의 계곡에 남게 될것이다. 

1787년 8월 2일, 쟉 발마의 방문을 반가이 맞은 소쉬르는 새로운 등반의 계획을 발마에게 설명한다 .나이48살의 소쉬르 그가 꿈꾸어오던 몽블랑등정의 현실이 이제 실현 될수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지난해 쟉발마의 등정후 곧바로 재등을 시도하였지만 짖궂은 날씨는 소쉬르의 욕심을 채워주실 않고 일년을 기다리게하였다. 

소쉬르는 18명의 가이드를 동원해서 그의 청춘을 모두 소비해버린 과학연구의 장비들과 그를 태우고 올라갈수 있는 가마 까지 포함된 대규모의 등반을 계획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몽블랑을 오르려는 일은 극도로 위험하고 어려운일 이었지만 어느누구도 소쉬르의 등반계획 고집을 꺽지 못하였다. 쟉 발마와 두명의 가이드가 선두에서 길을 안내하고 그뒤에 수많은 장비와 가마를 걸머진 가이드들이 뒤를 따랐다. 몽블랑 정상에서는 바다도 볼수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소쉬르는 마침내 정상을 올랐다. 

1787년 8월 2일 그날은 자연과학의 발전에 큰 기록을 남기는 역사적인 하루가 되었다. 소쉬르는 등반중 곳곳에서 만년설을 연구용 샘플로 채취하였고 몽블랑 정상을 구성 하는 눈의 요소와 고도에 따른 하늘의 색갈변화 그리고 오늘날 까지 이용되고 있는 그가 발명한 머리카락을 이용한 대기중의 습도 변화등 그의 고집스런 자연과학연구는 수많은 감동과 기록들로 후세에 남겨지게 된다. 고산에서는 섭씨80도에서 물이 끓는것과 불과 32미터의 오차를 남긴 몽블랑 정상의 고도 계산은 아직도 많은 과학자들에게 경이로운 기록으로 남아있다. 

1832년 어느날, 독일의 대문호 알렉산드 뒤마는 샤모니 계곡을 찾게된다. 나이 70의 고집스런 노인으로 늙어버린 쟉 발마 그는 그동안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앗던 1786년 여름 미셸 갸브리엘과 드라마틱하였던 몽블랑 등정 이야기를 알렉산드 뒤마에게 하게된다. 그리고 알렉산드 뒤마는 그의 진실된 이야기들을 정리하여 발표하게되고 쟉 발마의 뒤늦은 이야기는 공식적으로 몽블랑 초등사로 인정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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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남동건 (프랑스 파리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