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앨범

2019년 01월31일 ~ 02월03일(4일) 다낭(베트남),티엔무 사원 / 한강유람 - 06

정상고집 2019. 2. 11. 17:33

2019년 01월31일 ~ 02월03일(4일)

장소 : 다낭(베트남)

제 1일차 0131일 : 대성당 / 바나힐 ( 아들 과 함께한 여행 )


제 2일차 0201일 : 하이반고개 / 투득왕릉 / 카이딘왕릉 / 후에성 /티엔무 사원 / 한강유람


 티엔 무 사원이 틱꽝득 스님이 생전에 거처하던 곳이었고, 사이공으로 갈 때에 타고 갔던 차가 전시되어 있다.



티엔무 사원(베트남어: Chùa Thiên Mụ,)은 도시에있는 베트남 후에 시에 위치한 유서깊은 사원이다. 그 상징적인 7층 탑은 도시의 비공식적인 상징으로 여겨지며, 사원은 종종 후에에 대한 민속요와 월남문학의 대상이 되었다.

탑은 후에 시 흐엉롱 구의 하크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응우옌 왕조가 건설한 후에 성에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흐엉 강 북안에 있다.

1601년에 최초의 광남국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당시의 투안호아(현재의 후에)의 호족이었던 응우옌 호앙이 세웠다. 응우옌 가문은 당시 하노이를 통치하던 후 레 왕조의 관리였지만, 사실상의 베트남 중부의 독립적인 통치자나 마찬가지였다. 왕실연대기에 따르면, 호앙은 인근 지역을 여행하다가 빨간색과 파란색 옷을 입고 그곳에 앉아서 뺨을 문지르고 있는 천모(天姥)로 알려진 노파로부터 그곳의 전설을 들었다. 그녀는 예언하기를 한 영주가 와서 그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언덕에 탑을 세울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예언을 남긴 직후 그녀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 소식을 듣고 호앙은 이곳에 절을 지으라고 ​​명령했고, 이것이 ‘천모사’가 세워진 배경이었다. 

원래의 사원은 간단하게 지어졌고, 나중에 확장되고 정비되었다. 1665년 꽝남국 응우옌푹탄(阮福瀕)이 주요 건축을 착수했다.

1695년 조동종의 티치다이산(釋大汕) 선사가 중국에서 도착했다. 그는 광남국의 객승으로 초빙되어 법회를 열고 불교를 발전시켰다. 그는 청나라의 유명한 불교 학승이었고, 실력자였던 응우옌 푹추(阮福淍)의 후원을 받아 천모사의 주지로 임명되었다. 1696년의 7개월째, 그는 중국으로 돌아갔고, 추에게 보살 서원을 남겼다.

1710년 추(阮福淍)는 3,285kg의 거대한 종의 주조에 자금을 지원했으며 베트남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 유물 중 하나로 여겨졌다. 종소리는 10km 떨어진 거리에서도 들을 수 있었으며, 1840년대에 통치한 응우옌 왕조의 티에우찌 황제를 포함하여 많은 시가와 노래의 주제가 되었다.

1714년에 추는 사원 역사상 가장 큰 확장 단계인 주요 개사와 건설 공사를 감독했다. 대웅전 건물 이외에도 3중의 주요 문이 세워졌다.


Thích Quảng Ðức (釋廣德/석광덕) (티엔무 사원에 소신공양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1897년 ~ 1963년 6월 11일






베트남의 고승으로 베트남 불교 단체에 의하면 7살에 출가했고 이후로 1932년까지 수행을 거듭하다가 1932년에 안남불교회가 성립되면서 베트남 중부와 남부 일대를 돌아다니며 포교와 사찰 재건에 힘을 썼다고 한다. 이후로 캄보디아로 유학 가서 상좌부 불교에 대해서도 공부했고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 지배 체제에서 벗어난 후로는 남베트남에 머무르면서 사찰 재건 및 포교, 신도 교화에 힘을 쓰면서 남베트남 불교계의 거목이 되었다.

그러나 바오다이를 내쫓고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이 불교 탄압 정책과 독재 정치를 펴기 시작했고 친인척들이 대규모로 비리를 저지르면서 남베트남의 형세가 다시 막장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불교 탄압 정책에 맞서서 저항하던 승려들을 무차별 진압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틱꽝득은 이에 맞서서 소신공양을 하기로 결심했고 1963년 6월 11일 불교 승려들의 침묵 가두시위가 있었던 당시에 틱꽝득 스님이 주변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서 사이공에서 가부좌를 틀고 소신공양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사진과 영상이 특보에 호외, 속보를 타고 전 베트남은 물론 전 세계로 일파만파 전파되었다. 소신공양 당시 67세(세는 나이), 법랍 47년이었다.


사진과 영상이 전 세계로 보도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신공양의 사례일 것이다. 해당 소신공양 장면을 촬영한 미국의 사진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맬컴 브라운(Malcolm Browne)은 이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




사실 이 행위는 정권에 저항한 분신자살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끝까지 가부좌를 풀지 않고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 틱꽝득의 행동은 종교적인 열망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느끼는 고통 중 최고 순위가 작열통(몸이 불에 탈 때 느끼는 고통)인데, 죽음에 이를 때까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태연하게 견딘다는 사실은 인간을 초월한 인내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행위다. 문지방에 발가락 끝을 부딪혔을 때에도 저절로 비명이 나오고 얼굴이 찌푸려지는데, 온몸이 지글지글 불타고 있는 상태에서 신음 한 번을 내지 않고 얼굴을 태연하게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소신공양을 감행하기 이전에 제자들에게 "앞으로 넘어지면 흉한 것이니 해외로 피신해야 하며 뒤로 쓰러지면 투쟁이 승리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동영상을 보면 소신공양 중에 불길이 거세지자 쓰러질 듯이 앞으로 기울어졌지만 마지막 혼신의 힘을 쏟고 다시 가부좌 자세로 정좌하며 결국은 뒤로 쓰러진다. 이건 정말 자유에 대한 갈망이 낳은 기적적인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근육은 구부리는 근육이 펴는 근육보다 많기 때문에 소사체는 근육들이 수축해서 자연스레 안으로 오그라들기 때문이다. 표현조차 하기 힘든 고통 속에서 최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서 몸을 펴고 열반했다. 이 엄청난 광경에 경찰들도 넋을 잃고 멍하게 서서 스님을 바라보았고 주위의 승려들은 틱꽝득에게 일제히 절을 올렸다.

소신공양이 끝난 후 그의 법체는 다시 한번 소각로에 넣어져 8시간 동안 화장(火葬) 되지만 그의 심장은 전혀 타지 않았다고 하며[8] 이후 남베트남 정부에서 파견된 비밀경찰이 황산을 뿌려 훼손을 시도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하며 금속 용기에 구리줄로 봉인하여 스웨덴 은행에 맡겨졌다가 이후 하노이 국립 은행에서 소장 중이라고 한다.

이 사진이 미국 언론에 보도된 덕분에 원래도 이미지가 안 좋아지고 있던 응오딘지엠 정권의 이미지는 바닥을 치게 되었고 응오딘지엠을 그때까지 지원하고 있던 미국은 부패 정권을 돕고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됨으로 베트남 개입의 명분이 약해졌다. 그리고 인구의 90%에 달하는 불교를 탄압하며 어그로를 끌던 응오딘지엠 정권에 민심은 더욱 분노하게 되어 사회 혼란은 가중되었다. 게다가 응오딘지엠의 동생인 응오딘누의 마누라 "마담 누" 쩐레쑤언[9]은 틱꽝득 스님의 소신공양을 바베큐라고 하며 인간 이하의 고인드립을 해서 베트남 사람들의 깊은 빡침을 불렀고, 결국에는 남베트남을 지원하던 미국 정부까지[10] 응오딘지엠 정권을 완전히 포기한다. 불과 몇 달 후 응오딘지엠 정권은 미국이 지엠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다는 것을 확신한 군부의 쿠데타로 붕괴했다.

베트남전의 시작과 끝을 각각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한다면 틱꽝득의 소신공양 사진으로 시작하여 소녀의 절규로 끝나지 않을까. 왓치맨(영화)에서도 오프닝에서 베트남전을 상징하는 TV 영상으로 위 장면이 나왔다.

또한 이 사진은 서양의 발달된 물질 문명으로 동양을 농락할 수 있다고 여겼던 서양 세계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베트남 전쟁의 미국 패배는 이미 이 순간 결정되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틱꽝득의 소신공양 이전까지 동양의 이미지는 단순히 미개하고 개화되지 않았으며 전근대적인 동네라는 인식 정도였지만 이 사건 이후 서구 지식인들은 과연 서구의 물질 문명이 동양의 정신적인 문화의 가치까지 압도할 수 있는지 본질적으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 일이 있은 후 1970년대부터 서구에는 도리어 뉴에이지와 같은 반동적 흐름이 나타났는데 이것도 아주 무관하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세간에 떠도는 유명 어록 중에는 마틴 루터 킹이 이 사건을 거론하면서 남긴 말도 전해지고 있다.


…1963년 베트남 스님들의 소신공양은 서구 기독교의 도덕 관념이 이해하는 것과는 아무래도 좀 다릅니다. 언론들은 그때 자살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 본질을 살펴보면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항 행위도 아닙니다. 분신 전에 남긴 유서에서 그 스님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압제자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베트남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건이지만, 어째 한국에서는 그리 기억되는 사건이 아니었다. 반공주의의 영향과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경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한국의 상황상 베트남 전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허용하지 않았던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과거에는 교과서에서 틱꽝득의 소신공양 사건을 베트남의 혼란상으로 서술하기까지 했다.

틱꽝득 스님에 대한 책은 없었지만 미야우치 가쓰스케가 틱꽝득에 대한 내용을 쓴 《분신》이라는 소설이 나왔다.
틱꽝득 스님의 사건을 모방한 사례가 있었다. 사이공 미국 대사관 직원의 어린 아들이 가솔린을 몸에 뿌리고 불을 낸 사건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살아남았다. 하지만 몸에 불을 지른 만큼 심각하게 화상을 입었고 나중에는 "어떤 느낌인지 궁금해서 그랬다"라는 한 마디를 했었다.(...)

또한 틱꽝득 스님의 소신공양에 대해서 당시 우리나라의 언론인 중에서 한 사람은 방법의 과격함과 그 내용이 정교 분리에 어긋나는 것임을 들어서 비난하였다.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챔피언 리 신의 모티브가 바로 틱꽝득이다.

2018년 1월 7일자에 방송된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도 영원한 심장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다.

90~2000년대 랩메탈그룹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데뷔앨범 Rage Against The Machine(앨범) 커버로 해당 사진이 쓰인 바 있다.

응우옌 왕조의 수도였던 후에 외곽의 티엔 무 사원이 틱꽝득 스님이 생전에 거처하던 곳이었고, 사이공으로 갈 때에 타고 갔던 차가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