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习近平
중화인민공화국 제7대 주석
임기 | 2013년 3월14일 ~ |
출생일 | 1953년 6월15일 |
출생지 | 베이징 |
국적 | 중국 |
신체 | 180cm |
정당 | 중국공산당 |
학력 | 칭화대학 화학과 학사 칭화대학 대학원 법학과 박사 |
부모 | 아버지: 시중쉰(习仲勋, 1913년 10월 15일 ~ 2002년 5월 24일) 어머니: 치신(齐心, 1926년 11월~ 현재) |
자녀 | 딸: 시밍쩌(习明泽) |
형제자매 | 치차오차오(齐桥桥, 1949년 3월 1일 ~ ) |
마오쩌둥의 귀환
중국의 정치인. 중국의 제7대 국가주석이자 제5대 중국 공산당 총서기이며, 제6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2012년 11월 후진타오의 뒤를 이어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집권 이후 추진한 강력한 반부패 정책[8] 및 관제언론의 찬양으로 대중적인 이미지가 매우 좋아 중국에서는 시다다(习大大: 시씨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9] 그래서 내부 지지는 탄탄한 편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2018년 국가주석의 임기 철폐 개헌으로 사실상의 종신 집권을 선언했으며, 이에 따라 마오쩌둥 이후의 지도자들이 자제하던 1인 독재·우상화 체제를 부활시켰고, 더불어 그나마 숨통 트일 정도만큼은 있었던 중국의 사회적 자유화 수준을 급격히 하락시키고 있다. 중국의 젊은이들은 시진핑 치하의 중국이 북한을 닮아간다며 자신들의 조국을 서조선(西朝鮮; 시차오셴)이라는 신조어로 부를 정도라고. 일각에선 중국의 블라디미르 푸틴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물론 (명목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라 야당도 있고 대선이라는 합법적 절차를 밟아야 하는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는 달리, 사회주의 국가로서 중국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가 합법화 되어 있는 중국의 시진핑은 아무래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독재 자체가 성문법으로 규정되어 있으므로 본인의 권력 행사에 별다른 우회 수단이 필요치 않기 때문. 우리나라로 치면 유신헌법 이전과 이후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도올 김용옥은 시진핑을 푸젠성 위 부서기 출신으로 중국 공산당 중앙 후보 위원 150명 중에서 151등의 꼴찌였다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결국에는 당 총서기가 된 인간 승리의 표본이라고 찬양하는데, 그건 그냥 당시 당 간부들이 특채해서 중앙위 후보 위원이 됐기 때문에 서열상 꼴찌였을 뿐이다. 원래 관례상 150명만 뽑는 중앙위 후보 위원 자리에 당 고위 간부들이 시진핑을 억지로 밀어넣어서 151위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 원로였던 아버지 시중쉰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은 불문가지. 애초에 태자당 출신에 당 고위 간부들의 배후 지원까지 받는 중앙 후보 위원이면 승승장구하는 세습 엘리트의 전형이지 핸디캡을 논할 계제가 아니다.
다만 시진핑이 당시에 대권 후보로는 눈에 띄지 않는 인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후진타오 시대에 태자당의 선두주자였던 보시라이가 무리수를 범하다가 몰락하지 않았다면 시진핑은 절대 대권 주자로 발돋움할 수 없었다는 평이 있을 정도다. 잘해봐야 말석으로나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할 수 있었던 사람이 대권을 잡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원래 금수저인 시진핑이 당 고위 간부에 진입하는 것은 쉬웠어도, 당 최고위직은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본인의 능력뿐만 아니라 공산당 내부의 살벌한 경쟁을 뚫어야 하며, 이것을 뚫고 대권을 장악한 것은 아버지 덕이 아니라 본인이 이뤄낸 것이다. 물론 보시라이의 자폭과 파벌간 타협이 필요한 시대적 상황이라는 운이 따랐음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사실 총서기가 된 것은 몸을 낮춰서 된 것이지만 총서기가 된 이후 절대 권력자가 된 것에는 시진핑의 정치력을 인정해야 한다. 총서기가 된 2012년에는 사람들은 그가 강력한 지도자가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공청단이나 상하이방 계파 소속이 아니라서 2012년 당시에는 자기 세력이 없었고 온화한 이미지를 내세우며 몸을 낮춰 적을 만들지 않아 당내 계파들의 타협으로 총서기가 되었기 때문이다.(보시라이와 같은 태자당이지만 시진핑은 그 같은 강경파가 아닌 온건파 지도자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공산당 서열 2위이자 국무원의 총리인 리커창은 사실 성격이 호탕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시진핑은 내성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무색무취하고 안정 지향적으로 보였다. 계파의 타협을 통해 총서기가 된 시진핑은 집단지도체제의 허수아비가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전임자였던 후진타오도 유약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덩샤오핑이 죽기 전에 장쩌민의 후계자로 직접 지목했다는 정통성이 있었고 공청단이라는 지지 세력이 있는었지만 그런 스토리와 뒷배경이 없었던 시진핑은 약한 지도자가 될 것으로 보였다.
2011년 2012년 당시 기사들을 보면 시진핑은 "조심스럽다" "튀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비난을 받을 수 있는 모험을 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고 위키리크스에서는 지도력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총서기 취임 이후에도 반부패운동 초기에는 권위를 세우기 위한 일시적인 백일 엄포로 고위직은 무사할 것이라는 과소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자기 성격까지 숨기며 몸을 낮추던 시진핑은 총서기 취임 후 푸틴을 만나 "내 생각에 나와 당신은 성격이 닮았다"고 말하며 절대 권력에 대한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패한 인사는) 호랑이든 파리든 모조리 때려잡겠다"는 명분으로 대대적인 반부패 정책을 펴기 시작해 자신의 정적들을 차례차례 숙청해 나가며 반대 세력을 일소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2018년 3월 11일에는 개헌을 통해 국가주석직은 세 번 이상 맡을 수 없다는 조항을 없애버려 종신 집권으로 가는 문까지 열어버렸다.
중화인민공화국 시대(1949년 10월 1일 이후)에 태어난 첫 주석이기도 하다.
2.생애
5살 때 찍은 사진. 좌측 인물
베이징에서, 혁명 원로로 부총리였던 시중쉰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원래 섬서성의 토착 공산주의자로 류즈단(劉志丹)과 함께 해방구를 건설했는데, 중국 최남단에 있던 장시 소비에트가 국민당군의 공격으로 붕괴하면서 공산당 지도부가 대장정으로 섬서성으로 피신해오자, 시중쉰은 혁명의 새로운 근거지를 건설했다는 공로로 일약 당고위직에 진입한다.
시중쉰은 동료 공산당원 하오밍주(郝明珠)와 결혼했다가 1남 2녀를 낳고 1943년 이혼을 하고, 1944년 치심(齐心)과 재혼했다. 시중쉰은 치신과 2남 2녀를 두는데, 시진핑은 그중 셋째이다. 그러니까 총 3남 4녀중에서 6번째 자녀이다.
1962년 소설 류즈단 필화 사건[12]에서 시중쉰이 펑더화이파로 몰려서 반당(反黨) 집단의 낙인이 찍혀 오지로 귀양갔고, 당연히 초등학생였던 9살짜리 시진핑도 아버지를 따라 산시 성 시골로 하방(추방)되어 불행한 시절을 보냈다.
중국 공산당에서는 이 당시 시진핑이 토굴에서 7년간 힘겹게 살았다고 한다. 어렵게 산건 사실이다. 아버지가 실각해서 평민이 되었는데다가,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아버지가 마오에게 대약진운동에 대해 항의하다가 실각해서 대역죄인으로 찍힌 펑더화이의 부하에다가 반동을 미화한 소설을 펴낸 주범으로 몰렸기 때문에, 가족 전체가 박해를 받았다. 이 때, 아버지가 전처와 낳은 이복 맏누님 시허핑(习和平)은 이때 "반동의 딸"로 홍위병에게 두들겨 맞다가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시진핑도 이 당시 상당히 힘든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73년 당시. 왼쪽에서 두번째 인물
소싯적부터 리더십이 있었는지 하방 당한 곳에서 노동자들을 지도하여 최고의 생산량을 올렸다고 한다. 아버지가 반동으로 찍혔기 때문에 입당 신청을 했으나, 여러 번 퇴짜를 맞다가 문화대혁명이 완화된 1973년에야 겨우 입당했다. 이어 베이징으로 올라와 1975년 칭화대학의 화공과에 입학했다.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화궈펑이 정권을 잡고, 중앙군사위 주석, 당 총서기, 국무원 총리 세자리를 모두 장악했지만, 화궈펑은 리더쉽이 모자랐기 때문에, 결국 1979년 부총리였던 덩샤오핑에 의해 실각했고, 실권은 부총리이자 인민정치협상위원회 (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全国委员会) 주석이었던 덩샤오핑이 장악했다. 덩샤오핑은 부총리던 1978년 1962년 이래 16년간 죽 야인으로 지냈던 시중쉰을 정계로 복귀시켰고, 시중쉰은 1970년대 말부터 당고위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즈음 대학을 졸업하게된 시진핑도 당당히 태자당에 진입하게 되었다.
대학졸업 3년후인 1982년부터 허난성의 정딩현의 당부서기를 맡는 것을 시작으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이후 허베이성을 거쳤다가 1990년대부터는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보이는 남부로 전직했다. 그리하여 푸젠 성, 저장 성 등 동남부 지방 정부에서 지냈는데, 2007년 상하이 시 당위서기를 지내면서 장쩌민과 주룽지의 파벌인 상하이방과도 관계를 맺게 되어 태자당과 상하이방 양쪽의 후원을 받는 거물로 성장했다. 2008년에는 국가 부주석 직에 올랐다. 하지만 이때까지 보시라이와 리커창에 비해 외국에 덜 알려졌으며 한국에서도 그가 중국의 주석에 오를 것으로 미리부터 예측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는 부주석을 지냈던 쩡칭훙 외에도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지지와 후원 모두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부주석 겸 정협의장으로 있다가 2010년에 당 중앙 군사위 부주석 직에 오르면서 후진타오를 이을 차기 지도자로 공인되었다.
영국 주재 대사의 딸이었던 첫 아내와는 성격 차이로 이혼했고, 재혼한 현 부인 펑리위안은 중국 인민해방군 예술단 소속의 가수로 중국의 국민 가수로 불리는 사람인데, 펑리위안의 인기도 시진핑의 권력 상승에 도움이 되었다.
3.집권
전임인 후진타오 주석이 전전임인 장쩌민이 자기 권력을 내놓지 않겠다고 중앙 군사 위원회 주석 자리를 계속 유지하는 바람에 5년동안 반쪽짜리 권력만을 유지하였으나, 시진핑은 2013년 중국 공산당 제18회 당 대회 때 후진타오로부터 당 총서기와 중앙 군사 위원회 주석 자리를 동시에 이양받았고 2013년 3월 후진타오의 국가 주석 임기가 끝나면서 국가 주석 직도 승계하였다.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2013년 3월 14일부터 별 일이 없는 한 2018년 3월 14일의 연임을 거쳐서 2023년 3월 14일까지 중국과 중국 공산당 전체를 이끌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
사실 시진핑이 국가 주석에 오른 이면엔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권력 암투가 있었다. 장쩌민은 후임인 후진타오에게 권력을 승계하지 않고 그를 일종의 꼭두각시로 삼으려 했기 때문에 이 둘은 물밑에서 박터지게 싸웠는데 이런 암투 끝에 시진핑이 권력을 잡은 것. 장쩌민 입장에서는 태자당이야 어차피 자기 측근 쩡칭훙이 있으니까, 시진핑 역시 자기 사람이나 마찬가지고 후진타오 입장에서도 공청단 소속이 태자당에도 소속되는 등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인원들이 나름대로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진핑도 장쩌민의 꼭두각시가 될 생각은 없었기에 후진타오와 손을 잡고 장쩌민에 대항했고, 이게 현재 반부패를 핑계로 한 상하이방 대규모 숙청의 원인이 된다. 원래 장쩌민이 차기 주석으로 삼으려던 인물은 천량위였고 천량위가 실각한 이후 보시라이가 뜨자 보시라이를 주석으로 삼으려고 했다.
간략하게 설명하긴 했지만 사실 시진핑의 집권 과정은 더 복잡한 암투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중국 공산당 내 암투에 대해선 디시위키 시진핑 문서에서 잘 설명하고 있으니 참조해도 좋다.
4. 임기 중 행보
폭발적인 성장에 따라 부작용이 확대하는 것을 감안, 개혁으로 국가 동선을 움직이고 있다. 세계적으로 문제시되는 부정부패를 감시, 처단하는데 힘을 쏟고, 역시 세계적으로 문제시되는 빈부격차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성장과 복지에 모두 관심을 가질 것이며 중국 국내에서 2000년대 후반기부터 문제시 되어오던 한 자녀 정책은 시진핑 시대를 기점으로 폐지되었다.
1%의 국영 기업이 40%의 비중을 차지하는 경제에 대해서도 메스를 댈 듯하다. 하지만 중국 내 기득권 세력과 개혁 세력의 복합적인 이익 관계를 조정해야 하는 입장이고 게다가 사회적 혼란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정치와 법 분야의 개혁은 안정적인 기조로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경제 면에서도 마찬가지로 민간 기업의 몫이 늘어나겠지만, 전면적으로 정부와 무관하게 시장에 권한이 집중될 것으로 보기 어렵다.
임기 초반부터 개방 개혁을 우선 강조하며 강한 의지를 보였으나 이에 대해 보수 세력으로부터 견제를 받았던 것 같다. 그가 공산당 혁명 유적지를 찾기보다 개혁·개방 1번지인 선전을 방문해 덩샤오핑 동상에 헌화한 데 의구심을 표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후로는 마오쩌둥 기념식에도 꾸준히 참석하고 있다.
현재 자신의 정책을 실행해나가는 상황이며 계획생육정책의 골자인 한 자녀 정책을, 부모 중 한 쪽이 한 자녀일 경우 둘째까지 허용하는 방침이 그 중 하나이다. 노동 교화소 폐지도 정책으로 실행된다고 하였는데, 정식으로 폐지되었는지 아직 확인되진 않았다. 대대적으로 출범한 전면 심화 개혁 영도 소조 조장도 직접 맡고 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국내외 현안 전반에 걸쳐 추진 작업을 해나갈 것이라고 한다.
다만 중국 국가와 중국 공산당 독재 체제에 대한 변화를 근본적으로 꾀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이고, 미국과 똑같은 민주 정치 제도의 시행에는 부정적이며, 이 점에서는 여태까지의 다른 중국 권력자와 별반 다른 점이 없다.
2016년, 중국 인민해방군의 군 구조를 대규모로 개편한 데 이어, 2016년 4월에는 '중앙군사위 연합 지휘 중심 총지휘'라는 새로운 직함을 달고 군사 훈련을 지휘하는 모습이 보도되었다. 뺨 때리는 거 아니다.
2018년 3월 11일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헌법을 개정하여 임기 제한 규정을 폐지하고 시진핑 사상을 헌법에 추가하였다. 사실상 덩샤오핑 이래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어 온 집단지도체제를 종식하고 1인 독재 체제를 구축한 것으로 평가된다.게다가 헌법 개정안을 사실상 공개투표로 통과시킨 것이 알려졌다.관련기사 1인독재에 대한 비판과 우려를 의식한 것인지 개헌 직후의 연설에서 "이 개헌은 개인의 공명을 위한것이 아니며, 인민들의 평판과 역사의 앙금이 가신 뒤 진정한 평가가 내려질 것"이라고 말하며 개헌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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