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12월30일(금) ~ 2017년01월02일(월) (3박4일)
대상지 : (중국, 산동성, 웨이하이(위해) 철차산, 곤유산
제 1일차 : 행복문해변공원, 환치루공원,
제 2일차 : 철차산(鐵槎山), 장보고유적지, 적산법화원,탐방
웨이하이(위해, 중국어: 威海, 병음: Wēihǎi), 웨이하이 요새(중국어: 威海卫, 병음: Wēihǎi Wèi로도 알려짐)는 산둥 성 동부에 있는 도시이다. 산둥 성의 가장 동쪽의 항구이고 황해에 접해 있다. 인구는 300만 명, 면적은 5436 km2이다.
산둥 반도의 동쪽에 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북동남은 황해에 면해 있고, 북쪽 방향은 랴오둥 반도와 가깝고, 동쪽 방향은 한반도와 가깝다.
웨이하이는 주변 바다에 의해 영향을 받는 온화한 계절풍 기후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다. 8월에는 가장 더운 달이며, 24.3 °C까지 기온이 올라간다. 1월은 가장 추운 계절이며, -1.5 °C까지 내려간다.
항구는 청나라 때 북양함대의 기지였다. 1895년에 일본군과 청나라군 사이에 웨이하이 전투가 벌어졌다. 1895년에 일본군은 철수했다.
러시아가 1898년 3월에 반대편 해안에 위치한 뤼순을 조차지로 삼은 후에 영국은 러시아가 뤼순에 머무는 것을 조건으로 웨이하이를 조차했다. 1905년에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뤼순 항을 넘겨받자 영국은 일본이 뤼순에 머무는 것을 조건으로 조차지를 유지했다. 그래서 도시는 영국이 1898년부터 1930년 10월 1일까지 조차한 "웨이하이웨이"로 불리는 영토의 일부가 되었다. 이곳은 영국 해군의 여름 주둔지였다. 극동아시아의 왕립 해군은 중국 해안에 두 개의 주요 항구가 있는데 하나는 남쪽의 홍콩이고 또 하나는 북쪽의 웨이하이였다.
웨이하이가 조차지가 되었을 때 왕립 해군의 고위 해군 장교가 영토를 관할했다. 1899년에 관할이 군대에서 런던 전쟁 사무국이 임명한 시민 총독으로 바뀌었다. 영토 수비대는 200명의 영국군과 영국인 장교가 지휘하는 중국인 군대로 이루어져있었다. 1901년에 이곳을 요새화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관할은 영국 식민지 사무국으로 바뀌었다. 1902년에 영토를 운영하기 위해 시민 위원을 임명했고 1903년에 중국인 군대는 해산되었다.
웨이하이의 마지막 영국 총독은 레지날드 존스턴이었다. 이곳은 청나라 이후에 들어선 중화민국 때 반환된 후에 특별행정구가 되었다.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후에 웨이하이웨이 시는 웨이하이 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 웨이하이는 상업항으로서 주요 어항의 중심으로써, 경업공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2010년 현재 삼성전자, 삼성중공업 등 약 1500개의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으며, 약 3만명의 한국 교민과 600여명의 유학생이 생활하고 있다. 연간 한국인 관광객 수는 약 60만명 내외 이다.
산둥 대학교 캠퍼스와 하얼빈 공대 캠퍼스가 이곳 웨이하이에 각 1개씩 위치해 있다.
웨이하이 시는 해도(海岛)의 경치, 해안의 백사장, 온천, 기이한 산과 바위, 저수지, 호수 등의 자연경관을 비롯해 독자적인 양식을 갖춘 도시건축, 공원, 사적(史迹), 도교사원 등의 인문경관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웨이하이 시는 중국 제일의 위생도시이기도 하다. 80년대 말, 웨이하이 시는 6개의 관광 구를 형성하였다.
*환취러우(环翠楼)를 중심으로 한 시내 관광 구
*갑오해전(청일전쟁) 기념지를 주제로 한 류궁다오(刘公岛) 관광 구
*청산터우(成山头) 자연경치 및 진시황 순찰 유적지를 중심으로 한 청산터우(成山头) 관광 구
*석도(石岛), 9개 봉우리의 톄차 산(九顶铁槎山)을 주로 한 석도(石岛) 관광 구
*성징 산(圣经山), 즈취안펑(紫全峰), 동화궁(东华宫)등의 도교유적지와 타이보딩(泰礴顶), 싼반스(三瓣石) 등의 자연경치를 주로 한 쿤위 산(昆嵛山) 관광 구
*다루 산(大乳山) 루산커우(乳山口), 백사장을 중심으로 한 루산커우(乳山口) 관광 구 청산터우(成山头)는 산둥반도의 동쪽 끝에 있으며 톈진터우「天尽头」라고도 불린다. 한국에서 94해리 정도 떨어져 있다.
*적산법화원(赤山法华院): 장보고가 세운 절로 장보고 유적지이다.
위해위(威海卫)는 웨이하이 시(威海市)의 또 다른 이름으로서 중국 근대 제 1 해군부대 북양 수군 (第一支海军北洋水师)의 창시지(创始地)였다. 또한 청일전쟁 때 영국 해군의 주요 해군 기지였다. 1988년, 국무원은 웨이하이 류공다오(刘公岛), 청산터우(成山头)를 국가 급 풍경 명승지로 지정했다.
장도 청해진 장보고 유적지
1. 청해진의 설치 배경
8-9세기 동아시아는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무너지고 지방 도호들의 독자적 세력형성이 증가하던 시기이다.
청해진은 흥덕왕 3년(828)에 설치되었는데, 두목이 지은 『번천문집』「장보고·정년전」은
보고가 귀국하여 흥덕왕을 알현하고 말하기를 “중국을 돌아다녀 보니 신라인을 노비로 삼고 있었습니다. 원컨대 저에게 청해를 지키는 일을 맡기시면 賊 들도 하여금 신라인을 서쪽으로 끌어가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1만 명을 주어 그의 청대로 하니 大和이후로는 해상에서 신라인을 파는 자가 없어졌다.
위의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신라는 해상무역에서 해적들이 출몰하여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었다. 당에서 신라인들이 당나라에 팔리는 모습을 보고 돌아온 장보고는 왕에게 청해진 제안했다. 이런 해적들의 출몰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삼국사기』10 新羅本紀 10
헌덕왕 6년(814) 5월에 나라 서쪽 지방에 홍수가 났다. 왕이 사신을 파견해수재를 입은 주와 군의 1년 동안 납세를 면제해 주었다.
헌덕왕 7년(815) 가을 8월 (중략) 큰 기근이 들어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자 군사를 내어 이를 쳐서 평정하였다.
헌덕왕 8년(816) 봄 정월 (중략)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주려서 浙東지방에 가서 먹것을 구하는 이가 170명이나 되었다.
헌덕왕 13년(821) 봄에 백성들이 굶주려서 자손을 팔아 생존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위 사료에서 알 수 있듯이 흥덕왕대 빈번하게 발생된 자연 재해는 많은 농민을 몰락시켰다. 그러나 나라에 자연재해가 발생해도 중앙의 대응책은 큰 효과가 없었다. 백성들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의해 촉발되어 봉기를 일으키거나 타국으로 건너 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자손을 파는 자도 있었는데 중앙 귀족이나 지방의 촌주들은 백성들의 이러한 사정을 이용해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기회로 삼았고 이들은 자활을 위해 중앙 귀족이나 촌주의 전호 또는 노비가 되었다. 이런 상황은 서남해 연안에서는 해적의 발생으로 나타난다. 해안이나 강의 포구에 자리 잡고 성장하고 있었던 군소 해상세력가들은 혼란을 틈타 유민들을 규합하여 해적 활동을 하고, 당(唐)상인에게 신라인을 파는 행위까지 더해져 중개무역선의 약탈이 심화되고 있었다. 이런 지방 세력에서 일어나는 혼란을 막기 위해 흥덕왕은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 제의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2. 청해진의 위치&모습
완도 본섬 동쪽의 장좌리 앞바다에 전복을 엎어 놓은 듯 둥글넓적한 장도(장군섬)가 있다. 마을에서 장도까지의 거리는 180M 쯤 되고, 하루에 두 차례 썰물 때는 바닥이 드러나므로 걸어서 섬으로 갈 수가 있고, 물이 들어오면 다시 바다가 된다. 장도 너머로는 고금도, 신지도 같은 큰 섬이 보이고 그 두 섬 사이로 조금 멀리 약산도가 내다보인다.
장도는 9세기 신라 때 우리나라 서남 해안은 물론 중국과 일본의 해역까지 세력을 펴 해상로를 틀어쥐고 국제 무역을 주도했던 장보고의 청해진이 있던 곳이다. 그때의 유적을 확인하는 발굴 작업이 1991년부터 계속되고 있는데, 섬 위에서 토성 자리와 큰 건물 자리들이 여럿 확인되었고 통일 신라 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당초문, 연화문 암수 막새기와와 大나 官자가 적힌 철제 칼, 항아리들이 출토되었다. 또 중국 월주요 계통의 해무리굽 청자조각들이 많이 발견되어 청해진과 중국 사이의 교류 내용을 짐작하게 해 준다.
물이 빠졌을 때는 장도 남쪽 갯벌에서 목책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원래 청해진을 방비하기 위해 굵은 통나무를 섬 둘레에 박아 놓았던 것으로, 지금도 그 그루터기들이 바닷물에 절고 따개비가 다닥다닥 붙은 채 나란히 드러나 보인다.
3. 청해진 축제- 당제
장도 꼭대기에는 동그란 상록수 숲이 있다. 규모는 작지만 나무가 무성한 숲이며, 그 안에 장보고 장군의 위패를 모신 당집이 있다. 장좌리 사람들은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새벽에 이곳으로 와서 당제를 지낸다.
마을 사람들은 당제 전날 저녁부터 리사무소 앞마당에 모여 모닥불을 피우고 자정까지 놀이를 벌이고, 대보름 당일이 되면 꼭두새벽부터 바닷가에 모여 고깔을 쓰고 바지저고리에 장식띠를 맨 군고패를 앞세우고 장도로 향한다. 굿패들은 ‘청해장군 장보고’ 기와 ‘영’ 기를 들고 풍물을 잡히며 썰물로 갈라진 바닷길을 갈지자걸음으로 걷고 뛰놀며 장도로 가서, 섬 둘레를 세 바퀴 돌고 또 당집 주위를 세 바퀴 돈다.
해가 막 떠오르면 당제가 시작되는데 당집 안에는 제주 내외와 유사, 집사, 이장들만이 들어가 분향, 축문, 배례, 소지 등 절차를 진행하고 나머지 굿패들은 밖에서 따라 절하며 축원한다. 당제가 끝날 무렵에는 밀물이 들어와 있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배 여러 척에 나눠 타고 풍물을 잡히며 장도에서 나온다. 마을로 돌아온 후에는 하루 종일 집집이 다니며 지신을 밟고 저녁에 다시 바닷가에서 갯재를 지내기도 한다.
그런데 장도 당집은 지금 장보고를 모신 곳이라 하지만 오랫동안 송대장군당이라 불려 왔다. 1982년까지는 당집에 모셔진 위패도 송징의 것이었다고 한다. 송징은 고려 삼별초의 난 때 반란군을 이끌고 완도에 들어와 머물며 조운선을 습격하여 주민들을 구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고 전해지는 사람이다. 그는 송장군, 송대장군으로 불리면서 완도 사람들의 향토신으로 모셔져 완도읍, 죽청리, 정도리 등 이곳저곳의 당신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편으로는 송대장군은 실존했던 인물이 아니라 장보고의 별호였다는 추측도 있긴 하지만, 요즘도 장도 당제를 지낼 때는 장보고의 위패와 더불어 장보고의 친구였던 정년, 승려였다고만 전해지는 혜일, 그리고 송징의 위패가 함께 모셔진다.
이밖에도 장보고가 당나라 산동성 적산에 세웠던 법화원을 본떠서 세웠다고 전해지는 법화사터가 있다. 지금은 쑥대밭으로 변해서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항아리, 기와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장좌리와 그 남쪽의 죽청리 부근에는 장보고가 활을 쏘아서 산산조각이 났다는 바위, 청해진 군사가 당이나 왜의 해적을 잡아 가뒀다는 ‘옥당의 터’, 청해진 군사들의 식수로 썼다는 ‘청해정터’ 그리고 장보고와 그 가족들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장보네 묘’ 등이 있다.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을지라도, 장보고와 청해진의 여력이 천 년의 세월을 넘어 끈질기게 뿌리박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4. 장보고
장보고의 출생지와 출생 연도는 명확하지 않지만 대력 신라 제 38대 원성왕 때 우리 나라 서남 해안의 섬에서 태어났는데 완도가 바로 그의 고향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장보고는 청년기에 당나라의 서주로 건너가 서주 절도사의 본군인 무령군에 들어갔다가 곧 뛰어난 무예 실력을 인정받아 30세 때는 소장이 되었다. 장보고는 기마와 창술, 궁술에 뛰어났다고 한다.
신라 사람들은 8세기 이래 황해를 중심으로 왕성한 해사 활동을 벌였고 당과의 문물 교류도 활발했다. 근래의 연구에 따르면 장보고가 무령군 소장을 지내던 9세기 초에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는 신라인 유학승과 유학생이 많았다고 한다. 남쪽으로 양자강에서 북쪽으로 산동성에 이르는 당나라 동해안에는 신라 사람들의 집단 거류지인 신라방이 여럿 있었고, 신라인들의 자치기구로 구당신라소가 있었으며 그 책임자인 압아 역시 신라인이 맡고 있었다.
신라방 사람들은 주로 해상을 통한 교역 활동에 종사했는데 중국 연안에서 운송업과 상업을 하기도 했고 당나라에 온 아라비아나 페르시아 상인과 교역하기도 했으며 중국과 신라, 일본으로 다니며 국제무역을 하거나 농사를 짓는 사람도 있었다.
한편 신라는 경덕왕대를 고비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여 장보고가 태어나던 8세기 후반부터는 진골 귀족간의 왕권다툼이 심해져서 천수를 다하는 왕이 드물었고, 나라의 기강이 흩어짐에 따라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급격히 약해졌다. 이 틈을 타고 당나라 해적들은 신라의 해안 지역을 약탈하는가 하면 신라 상인들의 뱃길을 위협하고 신라 아이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팔기까지 했다.
장보고는 이러한 시기에 당나라에 머물면서 국제 해상무역에 대한 안목을 키웠고, 당나라 해적에게 끌려와 노예 생활을 하는 신라인들의 처지에 분노를 느끼면서 장차 해상권을 장악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키우려는 야망을 품게 되었다.
흥덕왕 3년(828), 장보고는 무령군 소장을 때려치우고 신라로 돌아왔다. 그는 왕을 찾아가서 남해 해상교통의 요지인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을 뿌리뽑고 신라인들의 무역로를 보호할 것을 주장, 청해진 대사로 임명되었다. 왕의 승인을 받은 장보고는 장도 둘레에 통나무를 박아 방책을 세우고 병기창, 군량창, 막사, 망루 시설을 짓고 성을 쌓아 청해진을 구축하는 한편 지리산과 남해 일대에서 아름드리 나무를 베어다가 배를 만들었다. 또 근처 섬 사람과 남해 연안 사람들을 훈련시켜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렸다.
장보고유적지입구
즐건시간을
전동카도타고
적산 꼭대기에 대명신을 모셔두고
소원을 담아서~~
청동 600톤으로 대명신을 만들었다고한다.
역시 대단한 중국임을 실감하게 한다.
이주위는 적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