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의명산-이미지/중국명산트레킹앨범

2010/01/05~09(4박5일)중국/오악중 서악 " 화산 " 산행

정상고집 2010. 1. 13. 20:17

2010년 1월 5일~9일(4박5일)

중국/오악중 서악 " 화산 " 산행

 

♣ 중국인이 꼭 가봐야할 중국 명소 - 서악 화산(西岳 华山)

 

 ☞ 서악 화산(西岳 华山 xiyue huashan)

높이 2,437m. 예로부터 오악()의 하나인 서악(西)을 화산이라 불렀으며 오악 가운데

 가장 높고 험준하다. 화산에는 차오양봉[] ·뤼옌봉[] ·롄화봉[] ·윈타이봉

 [] ·위뉘봉[]의 다섯 봉우리가 선인()의 손가락처럼 우뚝 솟아 있고, 험준한

 산길, 가파른 돌계단, 철삭()이 걸려 있는 난소()를 지나 산정에 이르면 웨이허[]

 평원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 화산 뤄옌펑 [ (화산 낙안봉)]

         난펑[]이라고도 한다. 해발  2,160m으로 화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이다.
        동쪽의 벼랑 아래에 '난톈먼[门]'이라고 적힌 돌패방이 있다.

 

     화산 차오양펑 [ (화산 조양봉)]

       둥펑[东]이라고도 한다. 해발 2,090m이며, 화산[]의 주봉() 중 하나이다.

         봉우리 윗부분에 핑타이[]가 있으며 계단을 이용해 올라갈 수 있다. 화산에서

         경관이 가장 수려하며,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차오양타이

         []로 불린다.

 

   화산 서악묘 [西]

     가뭄과 홍수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는 화산신(), 곧 이랑신()의 여동생인

      삼성모()를 기리기 위하여 한나라 무제() 때 건립된 사당이다. 화산의 산기슭에

      지어져 집령관()이라 불리다가 북위() 때 현재의 장소로 이전되면서 명칭도

      서악묘로 바뀌었다. 당나라 현종()이 화산을 금천왕()으로 봉한 뒤로

      서악금천왕묘(西)라고 불렀으며, 명·청 시대에는 서악묘 또는 속칭 화악묘

      ()라고도 불렀다. 1949년 이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성벽과 영성문(欞)·금성문

      ()·호령전(殿) 등 주요 건물을 재건하였으며, 전국중점문물보호지로

      지정되었다.

     부지면적이 12만㎡에 이르며, 고대의 궁전이나 단묘()와 마찬가지로 중축선이

      분명하고 좌우 대칭으로 건물이 분포되어 있다. 중축선을 따라 북쪽으로 주요 건물인

      조벽()·호령문()·오봉루()·영성문(欞)·금성문()·호령전(殿)

      ·만수각() 등이 차례로 들어서 있고, 좌우에 종루()·고루()·명왕전(殿

      영관전(殿)·어비정()·장경루() 등이 있다.

     주 건물인 호령전은 예로부터 제왕들이 직접 찾아오거나 대신을 파견해 서악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정면 폭이 7칸 37.2m, 안 길이는 5칸 22.6m, 높이 16.8m이며, 68개의

      기둥이 전당을 받치고 있다. 지붕에는 빛나는 청기와를 얹었고, 용마루에는 치문(鴟)·용·

      선인() 등이 장식되었으며, 청나라동치제(광서제(서태후(西) 등

      의 친필 현판이 걸려 있다. 이밖에 어서루()·여조당()·망화정()·방생지

      () 등이 있으며, '소비림()'이라 불릴 만큼 많은 석비()가 보존되어 있다.

 

    화산 옥천원 [ ]

      

      화산은 중국 오악()의 서악(西)에 속하는 명산으로, 숱한 도사들이 이곳에서
       수련하였다. 진()나라 때부터 화산신()에게 제사를 올렸고, 한나라 때 집령궁
       ()이라 부르는 최초의 도관이 세워진 뒤 많은 도관이 들어섰다. 옥천원도 그중
       하나로, 중국 도교의 3대 지존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진단(摶)이 은거하다가
       사망한 뒤 유골이 안치된 곳이다.

      진단의 제자 가득생()이 이곳에 사당을 세우고, 송나라 태종()이 진단에게
       하사한 희이선생()이라는 명호에서 따와 희이사()라고 이름하였다. 나중에
       희이사에서 솟아나오는 맑은 샘물이 서쪽 봉우리에 있는 진악궁()과 서로 통한다
       하여 옥천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후 훼손과 재건을 거듭하였고, 중국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1959년과 1985년 보수·증축되어 옛 경관이 거의 복구되었다. 1982년 중국중점
       도교궁관으로 지정되었다.

      모두 50여 칸의 전당과 누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원 전면의 첫 대문에 현대 중국의
       문인 궈모뤄[]가 쓴 현판이 걸려 있다. 그 뒤로 산문()을 지나면 건물이 중부와
       동부·서부로 나뉜다. 중부는 옥천원의 주체를 이루는 건물들로, 다시 전전(殿)과 후전
       (殿)으로 구분된다. 전전에는 전진도()의 조사 학대통(郝)의 신상이, 후전에
       는 진단노조()의 신상이 있다. 전전과 후전에는 광서제()와 서태후
       (西)의 친필 현판과 비문, 미불(芾)의 석비 등이 남아 있다.

      동부에는 화타묘(
팔괘정()·삼성모전(殿)과 회랑 등이, 서부에는
       산손정()·희이동()·무우정()·함청정()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밖에 주변에 선고관(운대관()·전진관() 등이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