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6월22일(토) 남이섬
2019년 06월22일(토)
날씨 : 맑음
장소 : 남이섬
남이섬(南怡ー)은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방하리에 있는 섬이다. 남이 장군의 묘역이 있는 문화유적지이자 관광휴양지로 개발된 곳으로서 2016년 현재 세계 122개국으로부터 130만명의 외국인관광객을 포함, 연간 총 330만명이 찾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방하리에 속해 있고 길은 경기도 가평군으로 통한다. 둘레가 약 5km로 작은 섬이지만 1960년대부터 나들이터로 이름을 떨쳤다. 현대에는 경춘선 복선 전철이 개통되면서 가평역에서 남이섬으로 바로 통한다. 한편 2010년 12월 세계에서 14번째, 한국에서는 최초로 유니세프 어린이친화공원(Unicef Child Friendly Park)에 선정되었다.
남이섬은 원래 섬이 아니라 구릉지로 형성된 작은 봉우리였다. 1944년 청평댐을 만들 때 북한강 강물이 차서 생긴 경기도와 강원도 경계에 있는 내륙의 섬이다. 금융인, 출판인이자 문화예술후원자인 수재 민병도(1916~2006)가 1965년 토지를 매입, 모래뿐인 불모지에 다양한 수종의 육림을 시작하였다. 1966년 경춘관광개발주식회사를 설립, 종합휴양지로 조성하여 오던 중, 90년대 말 금융위기로 인한 불황을 극복하고자 2000년 4월 주식회사남이섬으로 상호를 변경하여 관리해 오고 있다.
남이섬은 2001년부터 '문화예술 자연생태의 청정정원'이란 이름으로 재창업을 선언하고, 환경과 문화예술 관련 콘텐츠에 집중 투자하기 시작하였다. 환경 분야에서는 환경운동연합, 환경교육센터 및 YMCA, YWCA 등의 시민환경단체와 함께 재활용운동, 환경감시, 환경순화적 개발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으며, 지역사회 및 교육복지 분야에서는 지역 고등학교와 다문화미혼모복지기관, 독립유공자 지원을 위한 광복회 후원을 지속하고 있다. 또한 문화 분야에서는 유니세프, 유네스코 및 작가들과 더불어 순수미술과 종합예술축제 등 후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1960~90년대에는 최인호의 <겨울나그네> 촬영지 및 강변가요제 개최지로 알려져 행락객들의 유원지로 인식되어 왔으나, 2001년 12월 KBS 드라마 <겨울연가>의 성공으로 대만, 일본, 중국, 동남아를 비롯한 아시아권 관광객이 급증하면서 관광지로 탈바꿈되었다. 이에 남이섬 측은 그간 진행해 오던 각종 환경순화적 사업과 문화예술 지원사업을 강화하고자 2006년 3월 1일 국가형태를 표방하는 특수관광지, '나미나라 공화국'으로의 문화독립을 선언하였으나 이는 실상 관광 브랜드로서의 명칭이다.
설립자인 민병도가, 친일 행적이 있는 민영휘의 서자(庶子)인 민천식의 양자(養子)로 입양된 자이기에, 친일의 잔재가 아니냐는 논란이 있다. 일단은 주식회사남이섬 측에서는 민병도 본인은 요절한 부친 민천식과 함께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에서 지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이나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고 공식 입장에서 밝히고 있다. 다만 민영휘가 친일 행적으로 모은 재산을 후손이 물려받았는가에 대한 의혹으로 인해 섬을 매입한 자금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섬 내에는 노래박물관, 세계민족악기전시관, 평화랑갤러리, 남문갤러리, 나미갤러리, 문화원, 공예원, 행복원미술관, 유니세프홀, 안데르센그림책센터 등의 문화공간과 함께 모든 객실이 갤러리로 꾸며진 호텔정관루 등의 편의시설이 있다. 문화예술사업 담당기관인 남이섬문화재단에서 연간 600여회의 공연과 연극, 축제, 전시회 등을 펼치고 있어 국내 관광지 중 가장 많은 문화공연이 진행되는 곳이다.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배용준과 최지우가 남이섬의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과 은행나무 길을 걸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앞섬이라는 뜻의 남섬(南島)으로도 불렸던 남이섬 지명의 유래는 남이섬 북쪽 언덕의 돌무더기에 남이장군이 묻혀있다는 오랜 민간전승에 기인하여 자연스럽게 정착된 것이다. 다산 정약용의 저서 천우기행(穿牛紀行) 및 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 등에 따르면 이러한 민간전승 내용과 함께 일찍이 남이섬을 남이서(南怡嶼)로 부른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島(도)가 큰 섬을 가리키는데 반해 嶼(서)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작은 섬을 뜻한다. 남이섬 설립자인 수재 민병도 선생이 1965년 남이섬 조성 초기, 남이장군의 넋을 위로하고 장군의 기상을 기리기 위해 돌무더기 주위에 봉분을 쌓고 추모비를 세웠는데, 노산 이은상 선생이 추모 글을 짓고 일중 김충현 선생이 글씨를 썼다. 한편 남이장군의 행정상의 진묘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위치하고 있다. 남이섬 관리 측은 이곳을 친환경적인 체험 관광 문화 공간으로 되돌아가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가평(춘천) 남이섬은 관광휴양지로 개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강의 서쪽(가평군 방면), 동쪽(춘천시 방면)으로 모두 다리가 놓여있지 않다. 가평군 달전리의 선착장에서 연결되며, 남이섬 안의 선착장에서 남이섬 중심지를 오가는 궤간 610mm의 유니세프 나눔열차가 운행된다. 또한 남이섬과 자라섬 방향으로 운행하는 짚와이어로도 들어갈 수 있는데, 요금은 44,000원 남이섬 입장료가 포함된 가격이다. 짚와이어는 가평군, 경기관광공사, 남이섬이 출자한 법인에서 운영된다. 그리고 남이섬 선착장에서 남이섬까지 5~6분만에 갈 수 있다. 출입국사무소에서 입국 심사를 거친 뒤 선박을 이용하여 남이섬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선박은 카페리가 아닌 여객용 페리이다.
또한 경춘선 가평역이 인접해있다. 가평역을 이용해 전국 어디든 중간 기착지, 서울에서 1시간 내외로 접근할 수 있으며, 동서울, 청량리, 상봉 등 가평터미널까지 버스 노선도 운행 중이다. 더불어 외국인 관광객에게 인기가 많아 인사동, 남대문 등 서울 시내에서 남이섬 입구까지 직행 셔틀버스를 이용해도 편리하게 방문할 수 있다.
춘천에 있는 남이섬은 본래 섬이 아니었으나 청평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어 생긴 섬이다. 이섬에는 여러 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넓은 잔디밭이 있는 관광지로 춘천권에서는 가장 많은 개발이 이루어진 곳이다.
이 섬을 남이섬이라고 하는 것은 남이장군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남이장군은 조선 세종조의 인물로서 왕족(외척)이다. 17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세조 13년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공신이 되었으며, 27세에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세조가 죽고 예종이 등극한후 그의 공적을 두려워한 유자광 등에게 역적으로 몰려 28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남이장군은 젊은날 권람의 딸과 결혼을 하였는데, 그 전설이 전해진다.
남이장군이 소년시절에 하루는 큰 길에 나가 놀고 있으려니 어떤 작은 하인이 보자기에 무엇을 싸서 지고 가는데 그 보자기 위에 하얀 분면(粉面)의 사귀(邪鬼)가 앉아 있으므로 기이하게 여겨 슬그머니 그 뒤를 따라 간 즉 그 하인이 재상 권람(權擥)의 집에 들어가길래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있다가 집안에서 곡성이 나길래 집안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 집 대감의 딸이 갑자기 죽었다고 야단법석이었다. 그래서 사귀의 작간(作奸)임을 아는 남이는 그 집 하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어가면 그 처녀를 살리겠다」
고 하니 그 말을 전해들은 재상집에서는 별로 믿으려 하지 않다가 그래도 행여나 하고 그를 들어오도록 허락해 주었다. 남이가 처녀의 방에 들어가 본 즉 과연 어여쁜 처녀가 숨을 거두고 죽어 있는데 가만히 살피니 아까 보았던 사귀가 처녀의 가슴에 눌러 앉았다가 남이를 보더니 곧 피해서 달아나므로 그로부터 처녀는 차차 소생하였다. 그러나 남이가 나오자 처녀는 또 숨을 거두게 되고 남이만 다시 들어가면 처녀는 다시 소생하고 하였다. 이 때 남이가 보자기에 싸온 물건이 무엇인가를 집안식구에게 물어보자 조금 전에 가져 온 홍시를 먹자마자 가슴이 막혀 기절하였다고 말하였다. 그제서야 남이가 아까 보았던 사귀의 이야기를 권재상에게 하고 그에 적합한 약을 처방하여 죽었던 처녀를 마침내 살려내니 그 처녀가 바로 권재상의 넷째 딸이었다. 권재상이 살려 준 은혜를 생각하고 그 일을 기이하게 여겨 남이를 사위로 삼게 되었다 한다. 그 뒤 권부인은 결혼 후에 소생이 없었고 남이 장군이 화를 당하기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는 것이다.
남이장군이 모함을 받게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어느날 궁궐에서 숙직을 서다가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무심결에 '옛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나타날 징조'라고 말했는데, 평소에 남이를 시기하던 유자광이 이 말을 엿듣고는 남이가 역적 모의를 꾸민다고 모함하였다.
더구나 남이장군이 지은 시로 알려진 "南怡將軍 豪征詩" 의 한구절을 빌미로 삼아 대역 죄인으로 몰았다.
이때 지은 것으로 알려진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南怡將軍 豪征詩
白頭山石摩刀盡 백두산 석 칼 갈아 다 없에고
頭滿江水飮馬無 두만강 물 말 먹여 다 없에니
男兒二十未平國 남아 스물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後世惟稱大丈夫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유자광은 "男兒二十未平國"의 구절을 "男兒二十未得國"로 바꾸어 "나라를 얻지못하면"으로 해석하여 모함했다.
춘천의 남이섬에 있는 남이장군묘는 진짜가 아니라고 한다.
예전부터 남이장군 무덤이라는 불리는 묘가 한기 있었는데, 정확한 사실이 확인된 것은 아니고 다만 그가 이섬에 묻혔다는 전설이 담긴 돌무더기가 전하여왔고 그 돌을 함부로 가져가면 집안에 우환이 생긴다는 이야기가 인근 주민들사이에는 입으로 전한다고 한다. 그러나 남이장군의 무덤은 화성군 비봉면 남전2리에 버젓이 자리잡고 있다.
근래에 들어 남이섬은 '겨울연가'라는 드라마 촬양지로 유명하다. 그 때문에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찾아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