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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9월19일(화)~23일(토), 모씨장원(4박5일) - 11

정상고집 2017. 9. 28. 22:38

2017년 09월19일(화) ~ 23일(토) 4박5일

대상지 : 제산, 담계산, 지하은하 탐방, 천몽산, 모씨장원 탐방

 

제 1일차 : 위해 해상공원탐방 후 치박으로 이동

 

제 2일차 : 재산 / 담계산트레킹

 

제 3일차 : 지하은하 / 천몽산

 

제 4일차 : 모씨장원


모씨장원은 산동성 옌타이에서 한 시간 반 거리의 서하(치샤)에 있다. <모씨장원>은 중국 북방에서 가장 잘 보존된 봉건 지주의 장원으로 칭송되고 있다.
건축물과 그곳에서 발견된 많은 유물을 포함하여 중국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담긴 명문세가의 장원이다.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그곳에 대해 물으면 흔히들 "아, 부잣집!" 이라고 말을 하지만 부잣집 이상의 그 무엇이 있었다.
전통, 가풍 등 한 순간에 만들어지지 못하는 정신적 기운이 그곳에 남아 있는듯....
지금까지 <모씨장원>이 존재하는 이유가 넓은 장원, 그곳을 가득 채운 살림과 재산이 남긴 볼거리 때문이 아니라
모흑림과 후손들이 장원의 대지주로서 통치력과 넓은 아량으로 5, 6대가 지나도록 단단히 물려진 그 정신적 유산이 아니었을까.  

모씨장원은 청나라 옹정(雍正) 연간 1735년에 처음 건립 되었다. 모지의(牟之儀 모흑림의 조부)가 아우와 함께 고진도(古鎭都)에 고루(古樓) 한 동을 건축하였고, 그 후 1742년 고루의 동북쪽에 초당 4칸을 지어 이름 하기를 '소해초당(小懈草堂)'이라고 하였다. 대지주였던 모흑림(牟黑林 또는 모묵림(牟墨林) 1789~1870)과 그의 후손들의 주택으로 끊임없이 증축되어 민국24년(1935년)에 현재의 규모가 형성되었다.

모씨장원의 규모는 전체 약 2만 평방미터이고 청(廳), 당(堂), 루(樓), 상(廂) 등이 모두 489칸이나 된다.

입구부터 이어진 건물은 계속 연결되어 출구까지 마치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다. 크게, 동쪽에 있는 일신당(日新堂), 서충래(西忠來), 동충래(東忠來)와 서북쪽에 있는 보선당(寶善堂)과 서남쪽에 있는 남충래(南忠來), 사고당(師古堂) 등 6개 부분으로 구성 되어 있다. 그리고, 각각에 속한 방, 침실, 객실, 소루와 동서에 있는 행랑채는 남북의 장방형으로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흑림은 재물을 잘 운영하여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1000이랑에서 무려 4만5000이랑의 대토지의 지주가 되었다. 5대가 지나도 쇠락하지 않고 가업을 번창시킬 수 있었다는 것은 나름의 경영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째로 엄한 가정교육이 있었다. 유가의 사상으로 자손을 통솔하였고, 아무리 부유하여도 자손에게 일정한 액수의 생활비를 주어 엄격한 쓰임을 제한하였다고 한다. 

 

둘째, 관리인을 따로 두어 재물을 관리하였다. 전문 경영인을 두어 효율적으로 자산을 관리 운영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인사문제인데, 이들은 인재를 뽑는데 매우 엄격하여 3대에 걸쳐 인품이 훌륭한 사람을 먼저 기용하였으며 이미 사람을 썼으면 절대 의심하지 않고 전적으로 신뢰하였다고 한다. 

 

셋째, 흉년에 백성들을 구휼하는 등 선행을 널리 베풀었다. 농민봉기군이 서하성을 공략하고 모씨장원에 들려 식사까지 하면서도 모씨 가문의 재물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후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당시 사회환경 때문에 모씨장원 역시 마적이나 군벌, 관청으로 인한 피해도 입게 되였으나 1947년 토지개혁 전까지는 여전히 산동성 내의 갑부로 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