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감상실

山 노래하는 포크가수 신현대님의 " 설악가"

정상고집 2011. 6. 17. 23:46

 

 

< 설악가 - 신현대>

1,  굽이져 흰띠두른 능선길 따라, 달빛에 걸어가는 계곡의 여운을
내어이 잊으리요 즐겁던 산행을 잘있거라 설악아 내다시 오리니~

2,  저멀리 능선위에 철쭉꽃 필적에 너와나 다정하게 손잡고 걷던길
내어이 잊으리오 꿈같던 산행을 잘있거라 설악아 내다시 오리니~

3,  저높은 봉우리에 백설이 필적에 나는야 생각난다 친구의 모습
내어이 잊으리오 꿈같던 산행을 잘있거라 설악아 내다시 오리니~

 

신현대 - 설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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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에는 설악가라는 노래가 있다.  
그러나 설악의 노래는 슬픔과 산악인들에게는 찡하고도
서럽도록 아름다운 가사가 담겨져 있다.
그중 하늘에서 꽃이 내려와 앉았다는 천화대(天花臺)에 석주길 이라고 하는 릿지가 있다.
"천 가지의 꽃이 피어있다" "바위에 피어있는 꽃" "하늘 꽃"이라는 숫한

설을 남긴 천화대는 그 만큼 아름답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천화대는 비선대에서 철 계단을지나 천불동 계곡방향으로 가다보면 우측에 초입이 시작이다.

끝 지점인 공룡능선에서는 비선대 방향으로는 동북쪽으로 연결되어 있고 외설악을

대표하는 30개 이상의 크고 작은 봉우리를 넘어야하는 구간이다.
희야봉에서는 범봉을 앞에 두고 설악골과 잦은바위골 로 길이
갈라지고 맞은편으로는 범봉과 공룡능선으로 이어진다.

특히 잦은바위골에 다다르면 50m,100m 폭포는 장관을 이룬다.

천화대에서는 화채봉과 동해바다가 보이며 북동쪽으로 울산암이 바라보이는 곳 이기도하다.

풍광과 조망 또한 좋아서 등반 내내 발길을 멈추곤 한다.
이중 설악골에서 범봉사이에 성곽과도 같은 침니로 이어진 리지구간이 석주길이다.
이곳에서 엄홍석과 신현주라는 두 연인이 생을 마감한 산악인의 이야기가 있다.

 
외설악 노루목에는 1969년도 죽음의 계곡에서 눈사태로 10명이 운명을 달리한

십동지묘 와 설악산에서 등반도중 숫한 목숨을 잃은 산악인들의 묘지가 있다.
묘지에는 자그마한 동판에 적혀져있는 그들의 영혼을 달래는 글귀와 이름만이 남아있다.

그중 엄홍석과 신현주도 그러했다.
엄홍석과 신현주는 요델산악회 의 연인사이로 1967년 가을 등반중 목숨을 잃는다.
그중 같은 요델산악회원이었던 송준호와 는 생명줄을
잡아준다는 암벽 자일 파트너였기도 했다.


송준호는 악우인 엄홍석과 신현주의 넋을 달래 68년 7월 지금의 천화대 석주길을 개척하며 엄홍석의 이름 끝 자인 "석"과

신현주의 끝 자인 "주"를 딴 석주길이라는 길이 생기게 되었다.

산악계에서는 처음 길을 개척한사람에게 "명명(命名)권" 을 주게 되는데 송준호에게

명명권을 주어 두 사람의 석주길이라는 길이 설악산 천화대에 생기게 된 것이다.
여기서 송준호도 엄홍석과 신현주의 뒤를 따라 설악산 토왕성폭포에서 1973년 1월2일

새벽 등반 중 악우였던 엄홍석과 신현주를 따라 토왕성폭포에서 생을 마감한다.

근데 1973년 새해 첫 날밤 등반하루 전 그는 엄홍석과 신현주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긴다...?

죽음을 예감이라도 한 듯 번지 없는 주소로 엽서를 보낸다.
받는사람 "석주 귀하" 주소는 "벽에서 노루목" 보내는 사람 "준" 그것이 전부였다.

한편 서울에서는 토왕성폭포 등반을 마치고 돌아오겠다던 송준호의 애인은 1973년
1월5일 오후2시 서울 중앙극장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상영을 앞두고 그를 기다리다

그가 나타나지 않자 뇌리에 스쳐오는 송준호를 생각하며 극장가를 떠난다.
송준호는 그녀가 짜준 목도리와 장갑 모자를 가슴에 품은 채
토왕폭포에서 그의 곁을 영원히 떠나게 되었다.
송준호는 토왕폭을 등반 후 돌아와 그녀와 함께 스위스
등산학교를 유학 한 후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바람과 함께 사라졌지만...

 

훗날 다시 극장가를 찾은 그의 애인 은 영화의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 처럼

살아달라는 송준호를 생각하며 홀로 객석에서 눈물을 흘려야했다.
그 해 가을 산악회에서는 추모등반을 설악산 용아장성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동판은 제14봉에 부착했다.

애인은 동판에 송준호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고인의 뜻대로 강하게 살아가겠다고".

그 후 1974년 1월2일 1주기가 되던 해 그는 송준호와도 산 친구였던

00산악 농대출신의 한 사람과 함께 설악의 노루목을 찾았다.
그는 산 친구인 송준호에게 절을 하며 약속한다.

그녀와 함께 살아가겠다고...

그 이듬해 그들은 결혼해서 그들의 꿈이었던 목장을 이루고 살아가면서 설악가

처럼 굽이져 흰띠두른 능선길 따라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는 지금 설악산 노루목에 엄홍석 신현주와 함께 묻혀
있으며 이들 세사람의 충혼비는 이러하다.
"시간(時間)과 존재(存在)의 불협화음으로 공간을 활보하고 있는 악우(岳友)들이여! 철학적 경이로써 모둠된 그대들의 자취는 훗날 이 인자한 산정을 찾는 이들의 교훈일 것이다.

추억을 침묵으로 승화시킨 사람들, 그 대담한 의지로 회생하리라."
설악의 산하 한 암벽에 지금도 색 바랜 동판에는 그들 세
사람의 아름다운 산악인의 발자취가 노루목에 남아있다.

그래서 설악을 찾은 등반자들은 지금도 설악가를 부르는지도 모른다...

잘 잊거라 설악아 내 다시 오리니~라고!...